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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국회가 만든 법 예사로 뒤집는 ‘행정 독재’ |
이명박 정부가 세종시 원안을 백지화한다고 대놓고 말하고 나섰다. 그제 이명박 대통령이 내년 1월까지 수정안을 만들라며 원안 폐기 뜻을 밝히더니, 어제는 정운찬 국무총리가 국회에서 “행정기관 이전보다는 기업 위주로 가는 게 바람직하다”면서 수정안에 정부 부처 이전은 포함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대통령과 총리의 이런 말은, 지난 2005년 국회에서 제정되고 그 뒤 몇 차례 개정된 ‘신행정수도 후속대책을 위한 연기·공주지역 행정중심복합도시 건설을 위한 특별법’(행정중심복합도시법)을 무력화한 것이다. 행정중심복합도시법은 “국가는 행정중심복합도시가 수도권 과밀 해소 및 국가 균형발전을 선도하고 그 구심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방향으로 건설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국가의 책무(법 제3조)를 규정하고 있고, 이전 대상 중앙행정기관도 명시(제16조)해두고 있다. 정부는 법 개정 전까지는 이를 따라야 한다. 정 총리 스스로도 “정부로서는 국회에서 제정된 법률을 차질 없이 시행되도록 하는 게 기본 책무”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태연히 현행법을 무시했으니, 정부 책임을 내팽개친 것이 된다. 국회 입법을 행정부가 제멋대로 판단해 집행하지 않는 것은 헌정의 근본을 위협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일은 처음이 아니다. 이명박 정부는 지난 7월 비정규직법 시행을 눈앞에 두고 법 개정을 주장하며 그 시행을 피하려 했다. 6년 남짓 사회적 합의를 거쳐 제정되고 시행을 미루면서까지 후속 대책을 준비하도록 한 법인데도 정부가 앞장서 이를 무력화하려 했다. 당시 정부가 내세웠던 해고대란설은 얼마 안 가 거짓으로 드러났다. 정부는 마땅히 세워야 했던 사전·사후 대책도 게을리했다.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법을 뭉개려 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지난 3월에는 세제 개편안이 국회에서 처리되기도 전에 1가구 다주택자에 대한 양도소득세 중과 제도를 정부가 앞서 폐지했다. 의회가 정해야 할 세금을 정부가 마음대로 정해 물린 셈이니 월권에 해당한다. 양도세 중과는 부동산 투기를 막는 핵심적 조세 장치로 큰 몫을 했던 제도여서, 정부가 행정조처만으로 함부로 해체하거나 무력화할 사안이 아니었다. 실제로 아파트 값은 얼마 안 가 몇 년 전 수준으로 뛰었다. 이 밖에도 신문법과 지역신문발전특별법이 개정되기도 전에 신문지원기관의 통폐합을 기정사실화해 관련 기금을 대폭 삭감하는 따위, 정부가 국회 입법권과 실정법을 무시한 행태는 한둘이 아니다.
정부는 ‘실용’을 앞세워 이런 일들을 밀어붙인다. 정 총리는 “나라를 더 잘 만들기 위해선 법이라는 게 고정된 것이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 정치적 목적이나 행정 효율성을 위해서라면 기존 법률이나 국회의 입법 절차 따위는 언제든 무시할 수 있다는 사고방식이 아닌지 묻게 된다. 이번 세종시 원안 폐기도 야당은 물론 여당인 한나라당 내의 반대론을 무시한 채 정부가 앞장서 강행하는 양상이다. 이명박 정부가 입버릇처럼 내세우는 법치주의가 아니라, 권위주의 체제에서 신물나게 봤던 ‘행정 독재’의 흉한 몰골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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