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사설]
새해 첫날, 모든 ‘나’의 표고는 높다. 까치발을 하지 않아도 비상하는 새의 눈높이보다 높다. 지나온 시간을 반추하고 다가올 시간의 끝을 가늠하며 희망과 포부를 다지는 까닭이다. 경인년 새해 첫날, 우리가 딛고 있는 표고는 더욱 높다. 다시 역사의 분수령으로 떠밀려온 까닭이다. 산과 물이 나뉘듯이, 민권의 전진과 퇴행을 가르는 분수령이다. 우리의 시선이 나아갈 시간보다 지나온 시간을 먼저 응시하는 건 신중함 때문이 아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지난해 막다른 호소처럼, 담벼락에 대고 욕이라도 해야 할 만큼 상황은 위중하고 절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위기의 내용은 역사의 고비마다 외양만 달리한 채 되풀이 출현했던 것들이니 새로울 게 없다. 따라서 역사적 성찰 속에서 그 극복의 열쇠를 찾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일제강점 100년 등 과거 성찰할 때 흔히 지난 20세기를 폭력과 야만의 시대로 규정한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지구적 차원의 파괴와 대량학살의 시대를 열었고, 계속된 냉전과 패권전쟁 그리고 국지전은 역시 학살과 인종청소를 지구촌 구석구석으로 확산시켰다. 그 야만과 폭력의 극적인 무대는 바로 한반도였다. 식민체제의 수탈과 억압(국치 100돌), 6·25전쟁과 학살(60돌), 독재와 인권유린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폭력이 자행됐다. 병탄은 단지 수탈과 억압에 그치는 게 아니었다. 해방 후 반도의 분단과 사회 분열 그리고 억압체제의 근본 원인이 되었다. 외세에 의존한 불완전한 해방은 분단으로 이어졌고, 친일과 항일의 대결은 이념대결의 외피를 두른 채 해방공간에서 대규모 학살과 동족상잔으로 이어졌다. 이후 친일세력은 분단체제의 고착화를 통해 기득권의 유지 확대를 추구했으며, 거듭된 독재체제의 탄생은 그 결과였다. 분단과 독재는 병영사회를 강요하고, 민주주의와 인권을 유린했다.물론 야만의 역사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저항과 승리의 역사 또한 우뚝했다. 일제하에서 민중의 항쟁이나 해방 후 독재체제에 대한 투쟁은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끈질겼다. 4·19민주혁명(50돌)과 5·18광주항쟁(30돌) 그리고 6·10민주항쟁은 그 금자탑이었다. 민주정부는 그 속에서 탄생했고, 6·15남북공동선언(10돌)을 낳았다. 그러나 지금 구시대의 망령이 모두 부활한다.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던 전직 대통령의 자진과 용산참사는 상징적 희생제의였다. 지구적 금융위기와 함께 종언을 고했지만, 우리 사회에서 신자유주의의 망령은 여전히 맹위를 떨치며 민생을 벼랑 끝으로 내몬다. 사회·경제적 양극화 속에서 갈등과 대립은 계층·지역·세대간으로 확산돼 공동체의 근간을 흔든다. 분단 고착화의 망령도 부활해 다시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고, 개발독재의 망령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훼손하고 있다. 올곧은 실천 통해 미래로 ‘전진’ 민권은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사람 사는 세상 또한 저절로 이뤄지지 않는다. 김수영 시인이 말했듯이,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 법이고, 민권의 발전엔 어김없이 피와 눈물과 땀이 따른다. 시민의 각성된 의식과 적극적인 참여만이, 민권의 전진과 사람 사는 세상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파편화된 진보·민주세력의 전면적인 반성과 연대 또한 절실하다. 올해 지방자치제 선거는 그 시험대가 될 것이다. 역사는 도도하게 흐르지만 그 속의 사람들이 어떤 생각과 몸짓을 하느냐에 따라 방향과 질을 달리하기에 우리의 마음은 가볍지 않다. 너와 나의 올곧은 실천이 모여 우리 모두의 삶의 영역을 확장하고, 공동체를 풍요롭게 하며, 민족사를 진전시킬 것이다. <한겨레>는 오로지 진실보도로 망령의 허상을 드러내어 민권의 발전에 이바지할 것임을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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