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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6.19 17:35 수정 : 2005.06.19 17:35

신문사 다니는 동안 평기자만 하겠다고 생각했던 내게, 몇 달 전 신임국장이 “너 문화생활부장으로 발령냈다”고 통보했다. 그때 국장에게 이런 쪽지를 보냈다. “처자식 없는 놈을 부장 시키는 경우가 어딨습니까!” 결혼 안 하고 마흔살 넘게 살다 보면 관심사가 대다수 유부남·유부녀들과 달라질 수밖에 없다. 공동체의 기본인 가족에 대해 신경쓸 일이 별로 없으니 조직이나 사회 공동체에 대한 생각과 태도도 부실해질 수밖에 없다. 중앙 일간지 부장으로서 이건 치명적인 단점 아닌가.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오는 23일부터 여성부가 여성가족부로 바뀐다는, 아니 바꾸기로 이미 예정돼 있었다는 사실을 얼마 전 우리 부 기자가 출고한 기사를 보고 처음 알았다. 그 근거가 되는 법이 ‘건강가정기본법’이라는 것도. 처자식이 없으니 ‘가정’ 또는 ‘교육’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기사는 좀처럼 읽지 않았던 것이다. “역시 부장감이 아니야” 자책하는 사이로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건강가정? 건강진단 에이(A)가 나온 사람들로 구성된 가정을 말하나? 공부하자! 법조문을 찾아봤다.

아뿔싸. 나는 범법자였다. 이 법 4조(국민의 권리와 의무) 2항 “모든 국민은 가정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 복지의 향상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는 ‘의무’ 조항을 내가 지켰던가. … 인식하고 … 노력했다고 우기면 안 될까. 그래봤자 소용없었다. 내가 명백히 어기고 있던 조항이 바로 뒤에 나왔다. “모든 국민은 혼인과 출산의 사회적 중요성을 인식해야 한다.”(8조 1항) 위반한 조항이 둘을 넘기면 경합해서 형량이 1.5배로 뛰니까 나는 중범이다. “거봐요, 국장! 당신은 범죄자를 부장 시킨 거라구!”

다행히도 처벌조항이 없었다. 이 법은 일종의 복지법이었다. “건강한 가정생활”, “가족의 유지 및 발전”을 위해 국민과 국가, 지방자치단체가 “지원정책을 강화”하자는 법이다. 그래도 이상하다. 뭘 어떻게 지원할지만 분명히하면 되지 헌법을 방불케 하는 ‘권리와 의무’ 조항들이 왜 필요한가. 거기대로라면 내가 아는 상당수 유부남·유부녀도 범법자다. 일산에 전세 살면서 돈 모아 저축 안 하고 수시로 술 먹는 우리 신문사 아무개 기자는 앞의 4조 2항 위반이고, 남편에게 야근한다고 해놓고 새벽까지 술 먹는 아무개 기자는 “가족원 모두는 가족 해체 예방에 노력해야 한다”는 9조 1항 위반이다.

이 법이 규정한 ‘건강가정’은 “가족 모두의 욕구가 충족되고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는 가정”이다. 그런 가정 싫어하는 사람 있을까.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에서 권투하다 반신불수가 된 여주인공의, 인간답게 살 수 있을 거라는 마지막 희망을 밟은 건 보험금만 탐내는 그의 가족이었다. 가족이 개인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할 수도, 방해할 수도 있지만 누구도 그걸 쉽게 무시하지 못한다. 가족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유토피아적인 가정의 모습을 법조문으로 내거는 건 인간적이지 않다. 그런 조문으로 국민을 가르치겠다는 태도도 가부장적이다. 가뜩이나 가부장적인 게 한국 가족문화 아니던가.

여하튼 법은 올해부터 시행에 들어갔고 여성부는 여성가족부로 이름을 바꾼다. 자료를 보니 이 법에 대한 논란이 많다. 근대와 전근대가 혼재한 한국에서 가족이라는 문제부터 단순찮은데다, 여성문제, 신자유주의 시대의 복지정책이라는 문제까지 얽혀 있으니 당연해 보인다. 못마땅한 법조문에도 불구하고, 이제부터라도 가족이라는 문제가 본격적으로 토론의 도마에 오르길 기대해 본다.

임범 문화생활부장 is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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