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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황장엽, 기형적 분단체제의 일그러진 초상 |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가 그제 세상을 떴다. 북쪽에 있을 때 그는 기형적 사회주의 체제의 기초를 닦은 ‘주체사상의 대부’였으며, 남쪽으로 넘어와서는 북한 체제변화운동의 전위 노릇을 했다. 그의 이런 생애는 분단시대 우리 역사의 한 귀퉁이를 차지할 만하다. 따라서 그의 삶을 어떻게 기록할 것인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북한 최고 이론가이며 권력 핵심 인사였고 김정일 국방위원장 등 김일성 주석 자녀의 교육도 책임졌다. 그랬던 그가 남쪽으로 넘어와 자신이 기초를 닦은 주체사상의 사회정치적 생명관은 잘못이 없지만 이를 김일성 부자가 수령 절대주의로 왜곡한 게 문제라고 비판했다.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그는 14년간 김일성종합대학 총장, 11년간 최고인민회의 의장, 18년간 조선노동당 비서로 활동했다. 경제사회적 실패와 3대 세습 등 오늘날 북한 체제의 문제점과 그의 족적을 분리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는 망명 직후 “한국에 온 목적은 전쟁 방지와 평화통일에 기여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이런 인식 위에서 그는 북한 체제를 맹렬히 비판했으며, 그의 활동은 나름의 영향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그가 앞장선 이른바 북한 민주화운동이 과연 남북 대결 태세를 줄이고 한반도 평화를 증진하는 데 기여했는지는 의문이다. 되레 그의 행보는 일부 정치세력한테 극단적인 정쟁몰이와 대북 대결정책의 도구로 활용되었음을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의 망명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아내와 1남3녀를 북에 남겨둔 그는 “나는 가장 사랑하는 당신과 아들딸들 손주들의 사랑을 배반하였소. 나를 가장 가혹하게 저주해주기를 바라오”라고 유서에 적었다. 서울에서 그는 암살 위협에 시달렸다. 그는 안가에서 20여명의 중무장 보안요원들에게 둘러싸여 지냈다. 그의 안가에서는 “혼자 있고 싶다”고 적은 메모도 발견돼 그가 느꼈을 외로움을 짐작하게 했다. 그의 삶을 분단이 빚어낸 가슴 아픈 초상의 하나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의 장례를 통일사회장으로 치른다고 한다. 탈북자단체들은 그의 주검을 국립현충원에 안장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저세상으로 떠나는 마지막 길을 넉넉히 꾸며주자는 데 인색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부풀리려고 시도한다면 그것은 누구한테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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