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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북한 붕괴’라는 유령이 활개치는 외교·안보팀 |
미국 외교전문이 내부고발 전문 사이트인 위키리크스를 통해 공개되면서 우리나라 외교·안보 고위당국자들의 발언 내용이 논란이 되고 있다. 전문에서 나타난 이들의 인식은 외교·안보 정책 수립에 바로 반영될 수 있다는 점에서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북한의 앞날과 관련한 언급이다. 천영우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은 외교부 2차관이던 지난 2월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 미국대사와 만나 “김정일 사후 2~3년 안에 북한이 붕괴될 것”이라고 말했다. 전형적인 북한붕괴론이다. 현인택 통일부 장관이 지난해 7월 커트 캠벨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에게 “김정일은 2015년 이후까지 살 수 없을 것”이라고 한 발언도 마찬가지다. 이런 인식은 “중국 고위관리들은 한국 주도로 한반도가 통일돼야 한다고 믿고 있다” “북한 붕괴시 중국 군대가 직접 개입하는 일은 없을 것” 등 자의적인 분석으로 이어진다.
정부는 이들이 가까운 동맹국인 미국 쪽 관리들에게 개인 생각을 편하게 얘기한 것일 뿐 공식 입장이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발언 당시 정황으로 봐서는 그런 측면이 없지 않다. 하지만 그간의 대북정책을 살펴보면 큰 틀에서 이들의 발언과 상응한다. 모든 남북관계를 끊은 채 북한의 굴복을 ‘기다리는 전략’, 대북 제재와 압박을 기본으로 한 선비핵화 추구, 통일세 문제의 갑작스런 이슈화 등이 결국 북한붕괴론에 기초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북한 체제의 붕괴가 임박했다고 판단하면 합리적인 대북정책이 들어설 여지는 아주 좁아질 수밖에 없다.
북한붕괴론은 그 현실성과는 별개로 1990년대부터 꾸준히 제기됐다. 하지만 북한 체제는 문제가 많기는 하나 나름의 생명력을 가지고 유지된다고 봐야 한다. 대규모 우라늄 농축시설을 만들고 연평도 포격을 감행하는 것 자체가 역설적으로 체제의 지속성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 체제의 조기붕괴를 전제로 정책을 세운다면 실제 발생하는 모든 현안에 대해 왜곡된 대응을 하게 돼 사태를 악화시키기 쉽다. 90년대 김영삼 정부 때가 바로 그랬고 지금 정부도 여러 면에서 그렇게 되고 있다.
가능성의 영역에 머물러야 할 북한붕괴론이 정책을 지배하는 것은 유령이 현실을 좌지우지하는 것과 같다. 정부는 일방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실패를 자초하지 말고 현안 해결과 평화·통일 기반을 다지는 일에 전념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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