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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졸속 예산안 날치기, 국민에 대한 폭거다 |
여의도에서 벌어진 여당의 ‘기습 폭격’이었다. 전술은 기민했고 행동은 전광석화와 같았다. 예산안을 둘러싼 여야의 힘겨루기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때로는 거친 몸싸움 속에 여당이 단독으로 강행처리한 적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처럼 계수조정소위조차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서둘러 예산안을 날치기 통과시킨 적은 없었다. 한마디로 여당의 비이성적인 폭거라고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한나라당은 정기국회 마감을 하루 앞둔 어제 오후 질서유지권을 발동해 야당 의원들을 끌어낸 채 국회 본회의를 열어 새해 예산안과 예산부수법안을 날치기 통과시켰다. 국회는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곳곳에서 부상자가 속출했다. 이런 난장판 속에서 이명박 정부는 ‘3년 연속 예산안 날치기 통과’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정치는 조정과 합의를 기본 생명으로 한다. 특히 국민의 삶과 직결된 예산안 처리는 인내와 끈기, 타협과 설득이 무엇보다 요청되는 과정이다. 하지만 여당은 이런 모든 것을 깡그리 무시했다. “어떤 충돌도 감수하겠다”는 김무성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말에서는 오직 밀어붙이면 된다는 오만과 독선이 넘쳐날 뿐이다. 야당의 무기력한 대응도 지적받을 대목이 없지 않지만 국회 파행의 책임은 전적으로 여당에 물을 수밖에 없다.
한나라당이 초고속으로 예산안을 강행처리하면서 예산안 심사는 완전히 졸속으로 끝났다. 여당이 예산안 통과의 거수기를 자처했음은 예산안 액수로도 확인된다. 이날 통과된 전체 예산안은 309조567억원으로, 애초 정부안에서 고작 4951억원이 삭감됐을 뿐이다. 여당 스스로 의회에 부여된 권위와 권능을 내팽개친 낯부끄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예산안뿐만이 아니다. 4대강 주변 막개발을 가능케 하는 친수구역특별법을 비롯해 아랍에미리트(UAE) 파병 동의안, 국립대학교 법인화 법안 등도 직권상정돼 날치기 처리됐다. 우리 젊은이들의 귀중한 생명, 국토의 환경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법안들이 상임위 논의도 제대로 거치지 않은 채 ‘몽땅 떨이’로 통과돼버린 것이다.
한나라당의 이런 무리수가 청와대의 지시 내지는 교감의 결과임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명박 대통령은 그제 국무회의에서 “내년에도 계속 경제성장을 하려면 정기국회에서 예산안과 함께 중점 법안이 통과돼야 한다”고 주문했다. 한나라당은 이 대통령이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방문을 위해 출국한 사이 대통령의 지시를 완수하는 돈독한 충성심을 발휘했다.
여권은 도대체 무슨 마음을 먹고 이런 비상식적인 행위를 저질렀는지 궁금하다. 연평도 사태에 편승해 힘으로 밀어붙여도 국민이 지지할 것으로 믿은 것일까, 아니면 안보 무능, 대미 굴욕외교 등에 쏟아지는 비판을 만회하려는 안간힘인가. 또는 파문이 날로 확산되는 불법사찰의 궁지에서 벗어나 국민의 시선을 딴 데로 돌리려는 계책인가. 의도야 어쨌든 분명한 것은 이런 무리수가 결국은 부메랑이 돼 돌아오리라는 점이다. 한나라당이 예산안을 날치기 통과시킨 날 여의도 국회의사당 밖에는 눈이 내렸다. 하지만 여당의 폭거는 결코 흰 눈에 덮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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