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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날치기 폭거, 수습책은 원상회복뿐이다 |
한나라당의 고흥길 정책위의장이 어제 새해 예산안·법률안 날치기 파동과 관련해 당직을 사퇴했다. 집권당 차원에서 나름대로 민심을 달래보려는 몸짓으로 보인다.
그런데 고 의장은 어제 기자간담회에서 다른 사안들은 문제가 없고, 고작 불교계에 약속한 템플스테이 예산이 누락된 것을 뼈아프게 여긴다고 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발언이다. 이번에 예산안을 날치기하면서 상임위별로 여야간에 조정된 내용들마저 한순간에 날아가버렸다. 심지어 한나라당이 거듭 공약한 양육수당 예산마저 실종됐다. 이번 사태의 본질은 국회의 예산·법률 심의권이 송두리째 부정된 것이다. 이런 터에 고작 템플스테이 예산 누락과 관련해 정책위의장을 문책한다는 한나라당의 태도는 국민을 우습게 보고 다시 한번 속이려는 것일 뿐이다.
국회 안팎에선 날치기 처리에 따른 새로운 문제점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나오고 있다. 가령 보건복지위에서 여야가 서민복지 예산 1조2천억원을 늘리기로 합의했던 것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예결위가 낭비성 예산으로 지목해 전액 삭감하기로 한 ‘지역발전 정책 홍보’ 목적 예산은 어느 틈에 되살아났다. 여권은 예비비나 기금을 이용해 템플스테이 예산 등을 조달하겠다고 하지만 그런 땜질 처방으로 수습할 상황이 전혀 아니다. 아랍에미리트 파병동의안, 서울대법인화법, 과학기술기본법, 친수구역법 등도 감당하기 어려운 폐해가 예상된다.
사태를 수습하는 유일한 방법은 날치기한 예산안과 법률안, 동의안을 원상회복시키는 것이다. 과거 선례도 있다. 1996년 12월 신한국당이 노동법과 안기부법을 날치기했다가 노동계·시민사회가 총파업·시위로 맞서자 이듬해 3월 여야 합의로 재개정한 게 대표적이다. 곧 야당이 정부한테 예산안을 다시 짜달라는 예산안 수정 촉구 결의안을 내겠다고 한다. 아랍에미리트 파병동의안은 파병결정 철회 요구안을, 다른 법률에 대해선 개정안을 내겠다고 한다. 실효성 있는 후속 논의가 이뤄지길 기대한다.
야당의 비상한 대응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런데 제1야당인 민주당이 서울광장 천막농성에 시한을 설정하는 것을 보면 다소 미온적인 느낌도 든다. 지난해 언론관련법이 날치기 처리됐을 때 민주당 지도부가 의원직 사퇴서 제출과 전국 순회집회 등으로 강하게 맞선 것과 비교해도 결기가 부족해 보인다. 민주당은 자세를 더욱 다잡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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