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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이 대통령, ‘날치기 후폭풍’ 계속 모른척할 건가 |
새해 예산안 날치기 처리 이후 여권에 몰아닥친 후폭풍이 만만찮다. 지도부 책임론에 당정 개편론까지 제기되는 등 파열음이 커지고 있다. 안상수 대표와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얼굴을 붉히고 싸우는 등 당-정 갈등도 심상찮다. 여권이 총체적인 내홍에 휩싸여 있는 양상이다. 그런데 아무런 일도 없는 것처럼 시치미를 떼는 곳이 있다. 바로 청와대다.
이명박 대통령은 어제 기획재정부 내년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예산이 회기 내에 통과됐기 때문에 통과된 것을 매우 효과적·긍정적으로 집행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날치기 통과를 칭송하면서 예산안 집행을 강행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날림으로 처리한 예산안 곳곳에서 구멍이 발견돼 여권이 온통 아우성인데도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투다. 여론에 귀를 막아도 단단히 막아버렸다.
예산안 날치기 처리의 시작부터 뒤처리까지 그 중심에 청와대가 있음은 국민 모두가 다 안다. 안상수 대표나 김무성 원내대표 등 총대를 멘 한나라당 지도부의 책임도 결코 가볍지 않지만 궁극적 책임은 결국 이 대통령에게 있다. 지금의 여권 내홍은 청와대가 지시하면 당이 무조건 따르는 기형적 당청관계의 필연적 결과다.
더욱이 이번에 드러난 ‘대통령 가족 예산 챙기기’로 청와대의 도덕성마저 도마 위에 올랐다. 늘어난 것은 ‘형님 예산’과 ‘청와대 안방마님 예산’이요, 줄어든 것은 저소득층·노인·여성·장애인·농어민·비정규직·영세상공인 등 사회적 약자들의 몫이니 청와대는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어 보인다. “공정한 사회를 위해서는 실천이 가장 중요하다”는 이 대통령의 말이 옳음을 이번 예산안은 가장 역설적으로 보여준 셈이다.
안타까운 것은 그럼에도 이 대통령이 사태의 엄중성을 별로 심각히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데 있다.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여서 시간이 흐르면 그만이라는 안이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게 뚜렷하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1996년 노동법 날치기 통과가 정권 몰락의 신호탄이었음을 상기해야 한다”는 한나라당 내 지적을 경청할 필요가 있다. 모든 것을 떠나 여권의 난맥상을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듯 모른척하는 것은 무책임하고 비겁한 태도다. 상황이 이쯤 됐으면 청와대가 직접 국민에게 사과하고 예산집행을 보류하는 등 뒷수습에 나서는 게 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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