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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배상금 줄이겠다고 ‘억지 예외’ 만든 대법원의 무원칙 |
독재정권이 저지른 용공·간첩조작 사건의 피해자들에게 위자료를 지급할 때는 고문과 조작 따위 불법행위가 벌어진 당시부터 이자를 계산하진 말아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에서 불법행위가 벌어진 때를 기준으로 이자를 계산하는 우리 민사법의 일반적인 원칙에 어긋나는 판결이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이 원칙을 인정하면서도 이번엔 “예외적으로라도” 얼마 전인 항소심 변론 종결일부터 이자를 계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야 하는 법적 근거는 전혀 내놓지 못했다.
법원이 밝힌 이유는 궁색하기 짝이 없다. 불법행위 시점이 수십년 전이어서 원칙대로 이자를 계산하면 국가가 물어야 할 배상금이 너무 커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피해자들이 받게 될 배상액은 이번 판결로 크게 줄었다. 결국 국가가 과거 국민에게 저지른 잘못에 대한 책임까지 우격다짐으로 깎은 꼴이다. 그것도 정의와 인권의 보루여야 할 법원이 스스로 법 원칙을 외면하면서까지 앞장선 꼴이니 더욱 놀랍다.
이번 판결은 과거 잘못을 바로잡겠다는 사법부의 다짐과도 맞지 않는다. 판결의 대상이 된 <민족일보> 사건, 아람회 사건, 납북어부 간첩사건 등은 과거 권위주의·군사독재 정권이 조작한 사건임이 최근 재심에서 확인됐다. 그러기까지 수십년 동안 피해자들은 간첩 누명 등을 쓴 채로 억울하게 고통받아야 했다. 이들에 대한 배상은 그 피해를 회복시키려는 최소한의 조처다. 정해진 기준대로 정당하게 배상하기는커녕 이들에게만 엉뚱하게 예외를 들이댔으니 사법부가 또다시 씻지 못할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다시는 이런 국가범죄가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엄하게 징벌하는 효과도 내팽개쳐졌다.
이번 판결로 법원은 법리 대신 정치적 고려를 앞세웠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원칙이 흔들렸으니 개별 사건에서 구체적 정의를 실현하는 일도 한층 위태로워졌다. 이런 판결을 내놓고도 부끄럽지 않은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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