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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섭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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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태를 해명하기엔 ‘구시대적 병영에서 신음하는 신세대 병사’라는 명쾌한 문구만으론 부족하다. 구조적 문제를 보는 것만큼이나 구체적인 개인들의 삶에 켜켜이 쌓인 아픔과 분노를 보려는 시도가 중요하다. 1999년 4월 미국 덴버 인근 콜럼바인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총기 난사 사건을 전혀 다르게 본 두 편의 영화처럼 말이다.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콜럼바인>은 미국과 캐나다를 대비시킴으로써 공포와 폭력을 부추기는 미국 사회의 병폐를 찾아낸다. 반면,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는 평범한 이 학교 학생들의 그날 일상을 지루하게 반복하며 따라가다간 한바탕 피를 튀기고 끝난다.
그런데 개인들의 삶을 들여다 보려는 시도는 실패한 듯하다. ‘코끼리’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각자 나름대로 보는 데 만족해야 하는지 모른다. 아니, 차이와 다름이 강조되는 요즘 그 누구도 자신있게 전체를 이야기할 수 없다. 여성과 남성,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원주민과 이주민 등의 차이와 다름만 강조되는 시절이다.
하지만 중세 이슬람 신비주의 시인 루미가 들려주는 ‘어둠속에서 코끼리 만지기’의 끝은 누구도 전체를 알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루미는 이렇게 노래한다. “우리 각자가 촛불을 들고 있었다면/ 그리고 함께 갔다면/ 우리는 그걸 볼 수 있었으리라.” 미국의 현상학자 존 산본마쓰는 이 ‘촛불’을 서로의 고통에 공감하는 데서 시작하는 대화로 해석한다. 그리고 동물의 고통을 여성의 고통과 동일시하는 한 무리의 여성주의자들에게서 희망을 본다.
희망의 실마리를 보여주는 책 하나가 미국의 여성주의자이자 채식주의자인 캐럴 애덤스가 쓴 <프랑켄슈타인은 고기를 먹지 않았다>(원제 ‘고기의 성정치’)이다. 이 책은, 육식을 남성적 힘의 원천으로 보는 대부분의 문화에서 여성 억압과 동물 억압이 어떻게 연관되는지 수많은 사례를 통해 보여준다. 그리고 글쓴이는 “여성주의는 지배적인 세계에 대한 부정이자 표현이기 때문에 채식주의를 포함해야 한다”고 단언한다. (www.triroc.com/caroladams/slideshow.html에서 여성과 동물을 동일시하는 상업 이미지들을 볼 수 있다) 게다가 생산조립 라인에서 씨름하는 노동자와 도살장의 가축을 연결지을 수 있는 사례도 제시된다. 책은, 자동차 공장에 조립 라인을 도입한 헨리 포드가 “이 아이디어는 시카고의 포장업자들이 쇠고기를 포장하는 데 사용하는 천장에 매달아 놓은 운반기에서 따온 것”이라고 털어놨음을 지적한다. 포드주의가 노동분업을 통해 노동자들을 소모품으로 전락시켰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도 시카고 도살장의 대량 도축 기술을 확보하고 있었다는 다른 연구 결과들도 있다. 이는, 기존 지배질서 아래서 모든 소외 계층이 말 그대로 동물처럼 다뤄진다는 걸 강하게 암시한다.
동물을 뜻하는 영어 ‘애니멀’의 어원이 영혼이라는 뜻의 라틴어 ‘아니마’라고 한다. 모두 고통을 겪는 ‘영혼’들임을 서로 인정하면서 각자의 촛불을 들고 모이면, 억압의 근원을 함께 드러낼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것이 폭력적 군사문화인지, 뿌리깊은 가부장제인지, 비인간적인 자본주의인지 예단하지 않는다면 희망이 있다고 믿는다.
신기섭 논설위원 mari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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