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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고비 맞은 ‘이집트 민중혁명’과 미국의 구실 |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는 이집트의 반정부 시위가 고비를 맞고 있다. 30년간 이집트를 철권통치해온 무바라크 대통령은 연일 계속되는 시위를 진정시키기 위해 지난주 말 내각을 개편하고 정치개혁을 약속했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튀니지의 재스민혁명에 자극받아 거리로 나선 시위대는 무바라크가 사임할 때까지 시위를 이어가겠다고 공언하고, 무함마드 엘바라데이 전 국제원자력기구 사무총장을 중심으로 구국정부 구성을 위한 협의체를 꾸렸다. 반면 주요 도시에 진주한 군이 시위를 방관하면서 탈옥과 약탈 등 무정부 사태가 연출된 가운데, 악명 높은 경찰이 치안유지를 명목으로 다시 거리 곳곳에 배치됐다. 정부가 강력진압의 구실을 만든 것이란 우려가 제기되는 등 이집트의 민중봉기는 평화적 혁명과 비극적 유혈사태의 기로에 섰다.
관건은 이집트 군부와 미국이다. 가말 압델 나세르 전 대통령을 도와 왕정을 전복시킨 이래 군은 이집트 권력의 핵심 중추가 돼왔다. 시위 이후 지금까지 군이 보인 태도는 이중적이다. 시위를 유혈진압해 분노를 산 경찰과 달리 시위대를 적극 저지하지 않아 일단 국민들의 마음을 샀다. 그러면서도 주요 군 지휘자들은 무바라크와 함께 텔레비전에 등장해 그를 지지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시위대는 이런 군에 대해 ‘이집트냐 무바라크냐,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한다.
상황이 이렇기에 미국의 구실이 더 주목된다. 미국은 이집트에 연간 13억달러 규모의 군사지원을 하고 록히드마틴 등 주요 군산복합체가 이집트에 이권을 갖고 있다. 이집트 군부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처지다. 미국은 이집트 군부가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거역하지 못하게 신호를 보내야 한다.
미국으로선 ‘무바라크 없는 이집트’의 장래가 우려스러울 수 있다. 그가 이스라엘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미국 중동정책의 핵심 동반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집트인들의 민주화 열망을 짓누르는 것은 미국의 장기적 이익은 물론 국제사회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민주화 열망의 좌절은 테러에 의존하는 근본주의 세력을 강화시켜 중동지역과 세계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 위험이 높다. 미국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짓밟은 한국 군부를 지지함으로써 민주화를 지연시키고 반미감정을 촉발했다. 이제 다시 그런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말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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