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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한-유럽연합 FTA 번역 오류 수정은 시작일 뿐이다 |
통상교섭본부는 어제 한국-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 한글본에서 207건의 번역 오류가 발견됐다고 발표했다. 국내 산업계 등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에프티에이 협정문이 이렇게 엉터리로 번역됐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다.
번역 오류 내용을 보면, 정부가 한-유럽연합 에프티에이를 추진하면서 국내 이해당사자들을 얼마나 무시했는지가 그대로 드러난다. ‘이식’을 ‘수혈’로 잘못 번역하는가 하면, ‘공작기계’를 ‘공자기계’로 표기하기도 했다. 한글본을 근거로 협정에 대처해야 하는 국내 업계를 조금이라도 고려했다면 이런 엉터리 번역은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오류투성이의 협정문을 국회에 들이밀고서 빨리 비준해 달라고 독촉까지 했으니, 국회조차 안중에 없는 그 오만함이 놀라울 뿐이다.
정부는 협정문의 실질적인 내용과는 관계없는 단순한 번역상의 오류라고 하지만 그렇게 간단히 넘길 일이 아니다. 정부는 2009년 7월 한-유럽연합 에프티에이 타결을 전후해 무려 1300여쪽 되는 협정문 번역 작업을 했다고 한다. 정부도 인정했듯이 한글 번역조차 제대로 못할 정도로 여러 나라와 동시다발적인 협상을 벌였다는 것인데, 그런 상태에서 국익을 관철한 제대로 된 협상이 가능했는지 의문이 가지 않을 수 없다. 국회가 번역 오류만 수정했다고 해서 한-유럽연합 에프티에이를 그대로 비준해선 안 되는 이유다. 철저한 심의를 통해 독소 조항이나 국내 업계에 일방적으로 불리한 규정 등이 없는지 면밀하게 따져봐야 한다.
정부는 앞으로 법제처 심사를 거쳐 최종 한글본을 완성하게 하는 등 대책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근본적인 해결이 안 된다. 통상교섭본부가 국민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대외경제협상을 사실상 제 의도대로 할 수 있는 것은 국회의 제도적인 견제 기능이 없기 때문이다. 이번 번역상의 오류도 이런 제도상의 미비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대외협상 과정과 내용에 국회가 개입함으로써 정부가 일방적인 협상을 할 수 없도록 하는 법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한글 번역 오류에 대한 엄정 문책은 당연하다. 특히 협상을 총괄한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은 부하 직원들에게 책임을 떠넘길 게 아니라 자신이 직접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스스로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을 때는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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