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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행정부 독주 막을 ‘조약절차법’ 제정 서둘러야 |
최근 한국-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 협정문 한글본에 무더기 번역 오류가 발견돼 국제적 망신을 당한 바 있다. 그런데 이번엔 국회에 제출된 영문본조차 유럽의회가 지난 2월 통과시킨 협정문과 다른 것으로 드러났다.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갖는 국제조약문에 이렇게 오류가 많은데도 태평하게 국회에 들이밀 수 있었던 것은 이를 사전 또는 사후에 걸러낼 제도적 장치가 없기 때문이다.
번역 오류만이 아니다. 정부가 국회의 동의 없이 국제조약을 멋대로 체결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외교통상부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정부가 체결한 국제조약 가운데 81.7%인 2242건이 국회 동의 없이 체결됐다. 2016년까지 이전 시기를 늦추고 한국의 부담을 3조4000억원이나 더 늘리는 쪽으로 내용을 바꾼 용산미군기지 이전협정, 연합토지관리계획협정에 대해서도 정부는 국회 비준 동의를 받을 계획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7조원에 가까운 차관협정들 대부분도 국회 동의 없이 체결됐다.
이는 명백한 헌법 위반이다. 헌법 제60조 1항은 “상호원조 또는 안전보장에 관한 조약, 우호통상항해조약, 주권의 제약에 관한 조약, … 국가나 국민에게 중대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는 조약 또는 입법사항에 관한 조약의 체결·비준에 대한 동의권”이 국회에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자유무역협정이나 미군기지 이전협정, 차관협정 등은 당연히 이 범주에 들어간다고 봐야 한다. 그럼에도 정부가 자의적으로 판단하고 국회에 보고조차 않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정부가 국민의 주권을 제약하고 국민에게 재정적 부담을 지우는 조약을 국회 심의나 동의도 받지 않은 채 체결하면 국민들은 영문도 모른 채 피해를 보게 된다. 따라서 중요한 국제조약은 비준 동의뿐만 아니라 체결 계획과 조약 문안, 심의 등의 진행상황을 국민 대표기구인 국회에 보고하고 검증을 받아야 한다. 문제는 어떤 조약이 주권을 제약하고 재정적 부담을 주는 것인지 등을 판단할 근거법이 아직까지 없다는 점이다. 정부의 일방통행도 여기서 비롯했다.
여야는 2008년 ‘촛불사태’ 직후 18대 국회 개원 조건으로 이런 내용들을 규정한 통상절차법을 제정하기로 합의했지만 감감무소식이다. 당장 4월 국회에서라도 ‘조약절차법’ 제정 논의를 시작해 국회가 국제조약 체결의 모든 과정을 심의하고 검증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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