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1.19 19:47
수정 : 2005.01.19 19:47
“친구들은 그냥 쓰레기통에 버리고 다 돌렸다고 하재요. 아무도 모른다고. 힘들더라도 다 돌리자고 하니, 나보고 바보래요. 어떻게 했어야 하는 거지요?” 수능이 끝난 고3 여학생들이 아르바이트로 광고지를 아파트단지에 돌리는데, 이런 고민을 엄마에게 털어놓았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내 대답은 이랬다. “무엇이 옳은 삶인가를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입시학원처럼 되어 버린 고등학교에서 3년을 지낸 학생들이 아닙니까. 입시부정도 조직적으로 저지릅니다. 댁의 자녀는 무엇이 옳은 것인지에 대해 고민이라도 할 수 있으니 희망이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무엇이 학생들로 하여금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지 못하게 하였는가? 그 근본원인은 안보와 경제를 최고 가치로 내세운 억압적 통치방식과 이에 익숙한 사회문화에 있다고 본다. 지금부터 2500년 전 아테네의 상황도 오늘날 우리나라 사회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소피스트들은 출세를 성공의 척도로 보았고, 쾌락을 선으로 여겼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비판을 가하며, “무엇이 옳은 삶인가”하는 궁극적 질문을 아테네 젊은이들에게 던지지만, 안보나 경제 둘 다 잘 나가고 있는 아테네 사회에 먹혀들 여지가 없었다. 우리나라의 국가목표도 예나 지금이나 안보와 경제이다. 부국강병이 국가목표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정책목표 아래서 국민은 옳고그름을 구별할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심지어, 독재면 어떠냐, 잘살게만 해주면 된다는 생각이 큰 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이제 국가목표는 바뀌어야 한다. 안보와 경제에서, 교육, 문화, 복지로의 목표전환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안보와 경제도 더 좋아진다. 예컨대, 깨끗한 환경에서 강한 경제가 나오고, 건전한 문화에서 깨끗한 부가 창출된다. 정직, 신뢰는 사회적 자본인 것이다.
유럽의 경우, 문예부흥 100년, 종교개혁 100년, 그리고 계몽사상 100년 등 300여년의 정신적 고뇌를 거쳤다. 그 후에 산업혁명이 뒤따른 것이다. 미국도 국민소득 100달러가 안되는 시기에도 독재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했다. 스위스같은 작은 나라도 깨끗한 손과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세계 일등국가를 이루었다. 오늘날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심지어 교회조차도 자기희생에 의한 올바른 삶보다는 물질적으로 잘 사는 기복을 가르친다. 잘 사는 것만이 삶의 척도요 성공의 기준이라면, 우리나라는 어떤 희망이 있는가? 소크라테스와 비슷한 시기의 공자도 ‘잘사는 나라’ ‘강한 군대’ ‘신뢰받는 사회’ 중에서 최우선 순위를 ‘신뢰받는 사회’에 두었는데, 그 가르침은 오늘날 어디로 갔을까.
수능성적에 따른 대학 서열화도 모자라, 이제는 대학이 취직률까지 공개하도록 요구받고 있다. 분명한 것은, 일견 목적으로 보이는 취업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좋은 대학이 어찌 고시합격율, 취업율이 높은 학교일 수 있는가. 보이지 않는 것을 아는 능력, 선한 행동의 능력은 성적과는 무관하다. 비판적 사유능력과 도덕적 품성, 그리고 꿈과 상상력을 지닌 사람들이 주도권을 잡을 때 사회는 플러스 가치의 사회가 된다. 영국의 명문 아핑검 스쿨은 “졸업생 중에 재벌, 장관, 장군이 없는 것이 자랑”이라고 한다. 얼마 전 시어머니에게 자신의 간을 떼어준 며느리가 있었다. 이런 착한 며느리, 착한 아들, 훌륭한 아버지, 선량한 시민이 되도록 교육하는 학교에 못 들어가 아쉬워하는 날은 언제쯤 오게 될까.
정인화/ 관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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