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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납치사건’ 전모 함께 밝혀야 |
1974년 8월15일 세상을 흔들었던 ‘문세광 저격 사건’ 관련 외교문서가 공개됐다. 재일 한국인 문세광이 국립극장에서 광복절 기념사를 읽던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향해 권총을 쏘고 경호원들이 대응하는 과정에서, 대통령 부인 육영수씨와 여고생 한 사람이 총에 맞아 숨진 비극적 사건이다.
수사당국은 사건을 ‘북한 김일성 주석의 지시에 의해 문세광을 포섭한 조총련의 조직적 범행’으로 결론짓고, 육씨가 문세광의 총탄에 맞아 숨졌다고 발표했다. 문세광은 내란목적 살인,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속전속결 재판을 받고는 그해 12월20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문세광 사건은 당국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범행 동기와 배후 등에 의문이 제기됐다. 유일한 증거가 자백이고 일본 쪽 수사결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육씨가 문세광이 쏜 총에 맞아 숨진 게 맞느냐는 의혹도 따라다닌다. 공개된 문서가 이런 의문을 속시원히 풀어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일본 쪽 수사 기록과 한, 일 양국 정부의 긴박한 움직임이 공개돼, 실체적 진실에 한발 다가서는 계기가 됐다. 역사 바로 세우기는 물론, 국민의 알권리 차원에서도 바람직한 일이다.
눈에 띄는 것은 일본이 문세광과 조총련의 관련 증거를 잡지 못했다며 문세광 개인의 단독범행으로 결론지은 점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본의 이런 태도를 질타하고 조총련에 대해 단호한 조처를 촉구한 것도 눈길을 끈다.
육씨의 사망은 비극이지만, 그 전해 박정희 정권은 일본에서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국제적 망신을 샀으며, 사건이 난 해는 긴급조치를 발동해 정권안보를 꾀한 엄혹한 시절이었다. 한-일 관계, 남북관계가 긴장이 높아진 시점이었기 때문에 한국이나 일본이나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했을 소지가 다분하다. 일본 쪽의 정보가 공개되고 김대중 납치사건의 전모가 밝혀질 때 당시 역사를 제대로 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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