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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괴담’처럼 부풀려지는 대통령의 재협상 제안 |
민주당이 어제 의원총회를 열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한 이명박 대통령의 ‘선 비준 후 재협상’ 제안을 거부했다. 그럼에도 정부·여당은 이제 할 일을 다했다며 에프티에이 비준동의안을 강행처리할 태세다. 특히 익명의 미국 통상당국자가 투자자-국가 소송제(ISD) 등을 ‘논의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반응을 보인 것을 두고 미국 정부도 이 대통령의 재협상 제안을 받아들인 것처럼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국회 비준안 강행처리를 위한 ‘괴담’ 수준의 일방적 해석일 뿐이다.
이 대통령이 국회에 제안한 ‘선 비준 후 재협상’안은 새로울 게 전혀 없다. 협정이 국회 비준동의를 거쳐 발효되면 한-미 정부는 협정문 제22.2조에 따라 ‘공동위원회’라는 협의창구를 반드시 구성하게 되어 있다. 이 위원회는 협정에 근거해 설치되는 모든 협의기구를 산하에 두면서 협정 이행을 감독하고, 협정상의 약속을 수정하거나 개정을 검토할 수 있다. 또 두 나라 정부는 서면통보만으로도 상대국의 협의 또는 논의 요구를 받아주도록 되어 있다.
투자자-국가 소송제에 대한 이 대통령의 재협상안도 이처럼 협정에 따라 보장된 권리를 행사하겠다는 것이다. 미 통상당국이 이 대통령의 제안에 보인 반응도 이런 권리를 원론적으로 확인한 것일 뿐이다. 이미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과 론 커크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지난달 말 서신교환 형식으로 ‘서비스·투자위원회’ 설치를 합의하고, 투자자-국가 소송제의 유지 여부를 논의할 뜻을 밝혔다.
문제는 이런 협의가 협정문 개정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미 정부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만이다. 더구나 미국에선 의회 승인을 받아야만 협정을 개정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따라서 일단 협정이 발효된 다음에는 이 대통령이 할 수 있는 것은 미국 정부에 협의를 요구하는 선에 그친다. 이는 재협상을 통해 투자자-국가 소송제를 폐기하라는 야당의 요구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
이 대통령은 엊그제 국회 여야 지도부와 한 면담에서 “정직한 대통령으로 남으려 한다”고 말했다. ‘선 비준 후 재협상’이란 제안의 진정성을 강조한 말이다. 하지만 이 대통령이 진정성을 입증하는 길은 오직 하나다. 투자자-국가 소송제를 폐기하자는 안을 들고 미국에 재협상을 떳떳하게 요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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