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1.20 18:54
수정 : 2005.01.20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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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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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외교통상부는 ‘박정희 대통령 저격사건’ 관련 문서 15권 3,000여 쪽을 공개했다. 이 문서들을 통해 우리는 국교단절이 이야기될 정도로 악화되었던 1974년 당시의 한-일 관계를 생생하게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다. 왜 한국국적의 재일동포가 한국 내에서 한국 대통령을 저격한 사건이 한-일 두 나라 사이의 국교단절이 거론될만한 사건으로 비화했을까?
이 사건이 일어나기 꼭 1년 전인 1973년 8월 김대중이 도쿄에서 납치되었다. 사건 현장에서는 중앙정보부 요원으로 일본대사관에 파견됐던 김동운 일등서기관의 지문이 발견됐다. 이런 물증에도 불구하고 박정희 정권은 사건 관련성을 완강히 부인하여 한-일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고, 박 정권은 당시 총리 김종필을 ‘진사 사절’로 일본에 보내야 했다. 또 1974년 4월 민청학련 사건 당시 한국학생운동을 국외 공산계열이 지도하고 있다는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두 명의 일본인이 구속되었다. 이 때문에 일본 내에서는 박정희 정권의 일본 주권침해 및 인권탄압과 관련한 여론이 들끓었다. 1년여동안 일본정부 및 언론의 비판에 시달려오던 한국 정부는 문세광 사건을 계기로 반격의 기회를 잡았다고 판단했다.
한국 정부는 △문세광의 일본여권 소지 △일본인 요시이 미키코 부부의 방조 △일본경찰이 도난당한 총기의 범행사용 △범행의 배후조직이 총련인 점을 들어 일본의 책임을 추궁했다. 외무부 동북아1과는 사건 발생 직후인 1974년 8월21일 마련한 <대일조치방안(시안)>에서 “일본 정부에 법률적 책임을 묻기에는 국제법 상의 근거가 희박”하며, 오히려 야당과 자민당 좌파, 언론의 반발을 사서 한국 정부에 대한 비판여론만 거세지게 될 것이라고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김대중 납치사건 당시 중앙정보부 요원의 지문이 발견된 똑떨어진 물증도 부인한 처지에, 이 정도의 근거로 법적 책임을 묻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나 이런 신중한 태도는 묵살되고, 독재권력은 육영수씨의 피격·사망이라는 비극을 통해 역전을 시도한 것이다.
박 정권은 대 일본 창구의 하나인 무임소장관 이병희, 전 부총리 장기영 등을 파견해 매일 대책회의를 하면서 일본 각계의 요인들을 접촉했다. 일본이 성의있는 조처를 취하지 않을 경우 ‘국교단절’을 암시한 것은 실제 그렇게 하겠다는 것보다는 일본의 다나카 총리로 하여금 ‘진사사절’을 파견토록 하려는 압박용이었다. 한국은 사토 전 총리를 특사로 가장 선호했으며, 사토가 아니라면 오히라나 시이나 등 과거 한일교섭의 주역인 자민당 실력자가 특사로 와야 하며, 그 이하 급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면서 특사가 가져올 친서의 문구까지 세세히 요구했다. 당시 독재권력의 특성 상 실제 교섭은 외무부 공식라인을 제쳐 두고 한일유착의 비공식 라인이 가동된 것이다.
이번 문서공개를 통해 우리는 숱한 의혹이 제기된 8·15 저격사건의 진상에 한발 다가서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딱 한 발 다가선 것이며, 육영수씨를 절명케 한 탄알이 정말 문세광의 총에서 발사된 것인지, 한국 정부의 발표대로 문세광이 정말 총련을 통해 북과 연결된 것인지, 아니면 김대중 사건으로 촉발된 반 박정희 분위기 속에서 북이나 총련과는 무관하게 준비된 범행인지, 어떻게 문세광이 권총을 휴대하고 출입이 통제되는 행사장에 들어갔는지, 왜 문세광은 확정판결 3일 만에 황급히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했는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의혹은 무성할 뿐이다. 사건의 전모를 밝히기 위해서는 중앙정보부, 경찰, 검찰 등 관련기관의 문서 역시 공개돼야 할 것이다. 온 국민을 분노케 한 한-일 협정 과정에서의 검은 거래, 김대중 납치와 문세광 사건을 서로 덮어버린 한일유착 등 박정희 시대의 유산은 수십년 세월이 흘러도 우리 국민을 괴롭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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