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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부러진 칼’로 시늉만 낸 돈봉투 사건 수사 |
지난 1월 초 한나라당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가 시작됐을 때 언론과 정치권 등에서는 갖가지 관측과 분석이 쏟아졌다. 그동안 쉬쉬하던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느니, 정치권 전체에 쓰나미가 덮칠지 모른다느니, 낡은 정치 관행을 바꾸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등의 얘기가 그것이다.
하지만 어제 발표된 검찰 수사 결과를 보면 이런 기대와 전망은 부질없는 것이었다. 판도라의 상자에서 튀어나온 것은 고작 고승덕 의원이 자진신고한 300만원짜리 돈봉투 하나가 전부다. 정치권의 쓰나미는 고사하고 산들바람 수준도 되지 않는다. 낡은 정치 관행에 메스를 대기는커녕 혐의가 드러나도 우기고 버티면 빠져나갈 수 있다는 나쁜 선례를 남겼을 뿐이다.
검찰의 수사 결과 발표문을 보면 “노력했으나 확인할 수 없었다”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다”는 따위의 변명으로 도배가 돼 있다. 수사 발표문이라기보다는 검찰이 스스로 작성한 ‘무능 및 실력부족 고백서’라고 해야 옳다. 그런데도 검찰은 부끄러워하는 기색조차 없다. 이런 초라한 수사 결과를 내놓고서도 너무나 당당하고 자랑스럽다는 태도여서 검찰 발표를 접하는 사람이 오히려 당혹스럽다.
검찰 수사가 이렇다 보니 돈봉투를 받은 사람은 있는데 살포를 기획·지시한 사람은 증발해버렸다. 돈의 출처와 규모는 고사하고, 안병용 새누리당 서울 은평갑 당협위원장이 구의원들에게 금품살포를 지시하면서 건넨 2000만원의 출처조차 밝혀내지 못했다. 이 정도면 검찰의 고의적인 직무유기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고승덕 의원이 증언한 ‘쇼핑백 크기의 가방에 가득 들어 있던 돈봉투’가 어디로 갔는지는 애초부터 검찰의 관심사항도 아니었던 것 같다.
이번 사건은 몸통은 놓아두고 깃털만 건드린 수사의 전형으로 길이 기록될 듯하다. 박희태 국회의장, 김효재 전 청와대 정무수석 등 사건의 핵심 인물들은 모두 불구속 기소의 솜방망이 처벌을 받고 끝났다. “공직을 사퇴한 점 등을 고려한 결과”라는 것이 검찰의 설명이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법에 따라 처리한다’는 평소의 서슬 퍼런 원칙은 어디론가 실종돼 버리고 따스한 온정이 넘친다. 결국 말단 심부름꾼 노릇을 하다 구속된 안병용씨만 불쌍한 신세가 됐다.
현 정부 들어 검찰은 언제나 야당한테는 날선 칼이지만 여당한테는 ‘부러진 칼’이었다. 이 명제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또다시 증명됐다. 잇따라 터져나오는 현 정권의 각종 부정부패 의혹 수사를 이런 검찰에 계속 맡겨야 좋을지 참으로 회의가 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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