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안기부 불법도청 테이프에 담긴 중앙 언론사 사주의 발언은 기업비리를 다루는 통속소설에서 나오는 음모들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추악하다. 대선 후보의 정치 자문을 할 뿐만 아니라 선거 자금 배달부 노릇을 하고, 다른 후보에도 보험을 들기 위해 이중플레이를 마다지 않았다. 민의의 신성한 심판에 의해 가려져야 할 대통령 선거를 조종하기 위해 편집 간부를 동원해 공작을 하기도 했다. 언론사 사주로서 유권자와 독자의 공정한 판단을 돕기 위해 신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특정 후보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사적 도구로 신문을 전락시킨 것이다.족벌언론의 사주들이 자행하고 있는 횡포는 해당 업계에서는 제법 알려져 있지만, 이 정도로 생생한 사례가 공개된 것은 거의 유례가 없을 것이다. 사주들이 활동하고 있는 공간이 두터운 장막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사주들의 전횡 문제는 이번에 드러난 중앙일보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테이프에서 언급된 한 족벌신문은 사주 일가가 모여 김대중씨의 당선을 막기 위해 그의 약점을 부각시키기로 했는데, 산하 매체에 그런 방침이 반영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 신문의 사주는 권위주의 정권 시절, ‘밤의 대통령’이라고 불릴 정도로 위세가 당당했다.
너무도 자명한 일이지만, 언론의 자유는 결코 언론사 사주의 자유가 아니다. 중앙일보 사주의 추태가 불법도청 테이프를 통해 드러난 것은 대단히 유감스런 일이지만, 이번 사태를 계기로 28일 시행되는 신문법에 대한 족벌·수구 언론과 한나라당의 부당한 공격이 중지되기를 바란다. 신문방송편집인협회 등은 신문법이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들을 길들이기 위한 ‘언론통제법’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언론자유를 누가 유린하고 왜곡했는지 성찰해보기를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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