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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죽음의 진실 앞에서 유불리 따지는 어리석음 |
귀 뒤쪽에 손바닥만한 함몰이 선명한 장준하 선생의 두개골이 공개됐다. 37년 동안 가려져 있던 타살의 진실을 웅변하는, 정교한 인위적 파손이다. 하지만 그 앞에서 ‘도대체 누가, 왜?’라는 분노보다는 참괴함의 떨림이 앞선다. 도대체 살아남은 이들은 무엇을 했는가, 자책 때문이다. 선생은 자주독립, 민주화, 평화통일을 위해 한평생 사선과 백척간두의 삶을 살다가 결국 비명횡사했는데.
그 죽음 앞에서 박근혜 새누리당 경선 후보와 그 측근들의 허무맹랑한 말들은 분노를 깨운다. 물론 주군에게 쏠리는 따가운 시선을 차단하려 할 수는 있다. 하지만 ‘아버지 일을 왜 딸에게 묻는가’, ‘연좌제 적용인가’ 따위의 용렬한 짓을 할 상황이 아니다. 박 후보 자신도 ‘진상조사위에서 조사된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고 하니, 오십보백보다. 타살의 책임을 묻는 것도 아닌데, 지레 방어막부터 치고 나설 수밖에 없는 처지가 옹색하긴 하다. 그러나 장준하의 죽음은 광복과 민주화를 향한 위대한 역정의 돌연한 중단이었다. 민족적 비극이었다. 나라를 책임지겠다고 나선 이들이라면, 그 앞에서 책임 있는 자세를 보여야 마땅하다.
박 후보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장준하의 죽음은 일제하 일본군에 의한 독립군 토벌의 연장이었으며, 해방된 조국에서 일본군 부역자의 광복군 지휘관에 대한 저격이었고, 민주·민족세력에 대한 군사독재·친일세력의 테러였다. 그 막중한 무게를 알고 있었기에 박 후보는 2007년 선생의 부인을 찾아가 사과의 뜻을 전했을 것이다. “아버지 시대에 희생당했던 분께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평소대로 애매하고 정형화된 말이었지만, 그 의지를 폄훼할 생각은 없다. 아버지 박정희 치하에서, 그의 수족과도 같은 기관에 의해 저질러졌을 가능성이 컸으니 그로선 적지 않은 부담이었을 게다.
아비의 역사적 죄과를 사과하는 딸에게 돌을 던질 사람은 없다. 1975년이면 그가 사실상 퍼스트레이디 구실을 했으므로 책임이 크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건 유치한 비약이다. 아버지의 정치적 유산 위에서 대권을 꿈꾸는 이가 아버지의 잘못을 고백하는 건 용기이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건 역사적 잘못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진실을 드러내는 용기다. 역사 앞에서 유불리를 따지는 것만큼 졸렬한 소인배는 없다. 집권당의 사실상 오너로서 장준하 죽음의 진실을 밝히는 데 적극 협력하기 바란다. 이제 주검이 웅변하는 타살의 진실을 되돌릴 순 없다. 아버지 유산에 매몰돼 있다면 그에게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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