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8.05 19:36
수정 : 2005.08.05 19:37
사설
한마디로 허탈하다. 문민정부를 자처한 김영삼 정부에 이어 인권정부를 표방한 김대중 정부에서도 국가정보원이 불법적인 도청을 자행했다는 사실은 실로 충격적이다. 게다가 지금까지 정부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해 온 휴대전화 도청·감청까지 했다니 등골이 오싹하다. 국민의 정부 출범 뒤 명패를 바꿔 달면서까지 국가 정보기관의 환골탈태를 외쳤던 것도 모두 헛일이었다. 도청을 근절하기는커녕 컴퓨터를 동원해 전자우편으로 도청 결과를 보고하는 등 수준이 오히려 ‘격상’됐다니 말문이 막힌다. 모든 것이 거짓이요 위선이었다. 이제는 흘러간 유행어인 ‘모두 도둑놈’이라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은 국민 앞에 뭔가 속시원히 말을 해야 한다. 두 대통령은 재임시 안기부·국정원에서 올라오는 보고를 수시로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면 그 내용 중에는 도청·감청이 아니고는 파악하기 힘든 은밀한 정보도 들어 있었을 텐데, 그런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넘어갔는지 따져보고 싶다. 국정원이 대통령의 도청 근절 지시를 따르지 않은 사실을 대통령이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책임이 면탈되지는 않는다. 두 대통령은 사과든 진상 고백이든 뭔가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참여정부도 과연 할말이 있는가. 현정부는 그동안 2년 반 가까이 국정원의 도청 의혹에 대해 부인으로 일관해 왔다. 고영구 전 국정원장 등은 국회에서 “김대중 정부 들어서는 도청·감청이 없었다”는 말만 되풀이해 왔다. 도대체 진상을 알고서도 고의로 숨기려 했는지, 아니면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 채 헤매고 있었는지 궁금하다. 몰랐다고 해도 문제지만 만약 진실을 알고서도 어물쩍 넘어갈 심사였다면 도덕적 책임은 물론, 국회 위증에 따른 법적 책임까지 져야 할 것이다.
국정원이 어제 도청·감청에 대한 ‘자기고백’을 했다지만 진실은 여전히 장막에 가려 있다. 누구를 상대로 어떤 목적에서 도청을 했고, 그 결과는 누구에게 보고됐는지, 그 내용이 어떻게 활용됐다는 것인지 아리송하다. 2002년 3월까지만 불법도청을 했고 그 뒤에는 중단했다는 주장도 매우 미심쩍다. 어차피 국정원의 자체조사에 더는 기대할 게 없다. 앞으로 검찰의 철저한 수사와 이에 따른 엄중한 책임자 처벌이 있어야 할 것이다.
문재인 청와대 민정수석은 “참여정부에서는 불법적인 도청행위가 일절 없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이런 말도 이제는 그대로 믿을 수 없게 됐다. 과거 김대중 대통령이 “불법도청은 용납할 수 없다”는 말을 되풀이했는데도 도청·감청이 버젓이 자행된 형편 아닌가. 국정원이 대통령의 지시에 ‘항명’을 했다는 이야기인데, 현 정부에서도 국정원이 항명을 하지 않는다는 법이 없다. 심지어 국정원 관계자들은 사석에서 “어느 나라 정보기관치고 도청·감청을 하지 않는 곳이 있느냐” “도청을 한 게 문제가 아니라 세상에 밝혀진 게 문제다”는 따위의 말을 버젓이 하고 있는 실정이다.
국정원의 국내 파트가 존재하는 한 불법적인 정보수집의 가능성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따라서 이번 기회에 국정원을 근본적으로 개조하는 방안을 심각히 검토해야 한다. 국정원의 기능을 바꿔 아예 대북·국외 정보만을 담당하도록 하는 게 원천적인 해결책일 수도 있다. 노무현 대통령도 대선 전 자신이 대통령이 되면 국정원을 국외정보만을 수집하는 해외정보처로 바꾸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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