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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론스타에 제소 빌미 준 ‘투자자-국가 소송제도’ |
외환은행 인수-매각 과정에서 ‘4조원대 먹튀 논란’을 일으켰던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가 한국 정부를 세계은행 산하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에 제소했다. 소송금액을 명시하지 않았지만 앞서 제출한 중재의향서에 따르면 수십억유로(수조원)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외환은행 매각 과정에서 한국 정부가 승인을 지연했으며 차별적인 과세 조처를 취해 손해를 봤다고 하는데, 뻔뻔스럽고 터무니없는 주장이다.
론스타는 은행을 인수할 자격이 없는 산업자본인데도 그 사실을 숨기고 대주주 자격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주가조작, 탈세 등의 온갖 범죄를 저질렀다. 세금 문제는 벨기에 회사가 페이퍼컴퍼니에 불과해 한국 정부가 과세하는 게 정당하다고 법원에서 결론 내린 바 있다. 그런데도 한-벨기에 투자보장협정을 들어 투자자-국가 소송을 제기하다니 적반하장이 따로 없다. 론스타는 우리 금융당국에 신고하지 않은 지배회사를 원고로 넣어, 과거 이를 누락했으며 이들을 포함하면 산업자본이었다고 자백한 꼴이 됐다고 한다.
론스타도 문제지만 처음으로 투자자-국가 소송을 당한 우리 정부도 한심하다. 4년 전부터 론스타가 중재를 언급했는데도 정부는 두 손을 놓고 있다시피 했다. 지난 5월 론스타가 중재의향을 밝힌 이후 총리실에 대응팀을 꾸렸지만 처음부터 제소가 아니라 문제제기라며 축소하는 등 비밀주의로 일관했다. 정보 공개 요구에 불응하고 중대 사안에 대해 이해 당사자의 의견과 전문가들의 지혜를 모으려는 노력을 제대로 하지도 않았다. 한-벨기에 투자보장협정을 개정하면서 조세피난처의 페이퍼컴퍼니에 대한 안전장치를 마련했다면 이번처럼 무리한 송사에 휘말리지 않았을 것이다.
한-벨기에 투자보장협정과 투자자-국가 소송제도는 한-미 자유무역협정의 그것과 닮은꼴이라고 하니 앞으로가 더 큰 문제다. 정부는 한-미 자유무역협정의 투자자-국가 소송제도가 국제표준이며 따라서 과도한 우려를 할 필요가 없다고 장담했지만 독소조항의 위험성이 그대로 드러났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의 투자보장협정을 근거로 외국기업들이 투자자금 회수는 물론 사회서비스, 보건의료서비스 같은 공공정책에 대해 소송을 남발할 가능성이 예견되기 때문이다.
정부가 지레 공공정책에 대해 소송의 위험성을 판단해야 한다면 사법권뿐만 아니라 정책 주권까지 제한받을 수 있다. 이미 유통법과 상생법의 경우 통상교섭본부가 통상마찰에 대한 우려로 반대의사를 밝힌 바 있다. 독소조항인 투자자-국가 소송제도는 재협상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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