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설] ‘기억의 영화’가 직시한 불편한 진실들 |
멀리는 <유신의 추억>에서 <26년>, <남영동 1985>를 거쳐 가까이는 <엠비(MB)의 추억>까지, 요즘 영화계는 추억 만발이다. 이미 스크린에 걸린 것도 있고, 개봉을 기다리는 것도 있다. 폭정, 학살, 고문, 퇴행의 기억을 다룬 영화들이다. 대체로 평가도 좋아 관객 평점에서 ‘남영동’은 2위, ‘엠비’는 3위를 기록했다. 올해 최고의 흥행작 <광해, 임금이 된 남자>도 크게 따돌렸다. 저예산 영화답지 않게 ‘남영동’은 흥행에서도 성공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런 풍경의 한편에선 ‘정치영화’라고 싸잡아 비난하는 날 선 소리, ‘왜 아직도 과거인가’라고 따지는 볼멘 질문도 나온다. 인상비평, 혹은 정치적 유불리를 따지는 질문이란 건 영화 한 편만 보면 안다. 오히려 이들 영화는 왜 아직도 우리 사회가 그 과거를 응시하지 않으면 안 되고 또 응시할 수밖에 없는지, 그 과거가 어떻게 현실로 되살아나 지금도 우리를 괴롭히는지, 미래로 내딛는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는지도 알려준다. 그 ‘과거’는 집단적 트라우마로 남아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와 형제애의 진전을 가로막고 있다. 개발독재, 인권유린, 사찰, 조작 등 이 정권이 부활시킨 괴물들은 바로 그 과거가 살아있음을 웅변한다.
감당할 수 없는 폭력, 사고, 절망, 슬픔을 당할 경우 남게 되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가 트라우마다. 트라우마는 개인의 사고와 행동을 위축시키고, 이상행동을 유발하기도 하다. 집단 역시 마찬가지다. 국가에 의한 4·3 학살이나 보도연맹 학살의 기억은 자기검열을 내면화하고, 집단적 사고와 표현의 장애로 나타난다. 납치, 구금, 고문, 사법살인 혹은 삼청교육대 녹화사업 등 국가폭력의 트라우마 역시 공동체의 정상적인 성장과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가 된다.
트라우마는 관련 기억과 감정을 드러내고 정면에서 응시하고 따질 때 극복될 수 있다. 그 끔찍한 기억과 마주하는 게 힘들지만, 숨기고 회피해서는 그 끔찍한 기억의 감옥에 더 깊이 갇힐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신과 5공의 국가폭력을 드러내는 기억의 영화들은, 오히려 공동체의 집단장애를 치유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사실 이런 과거를 불러낸 것은 박근혜 후보다. 그가 출마하지 않았다면, 국가폭력의 기억이 영화화될 리 없다. 5공은 유신의 연장이었고, 5공의 고문·학살·폭력은 그 유산이었다. 박 후보는 영화 <시네마 천국>이나 <빌리 엘리어트>를 감명깊게 봤다고 한다. 그런 멀고 먼 이야기도 좋지만 그의 시대, 우리 공동체가 겪었던 절망을 성찰하는 영화에도 관심 갖기 바란다.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