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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KBS 기자들, 오죽하면 제작거부 결의했을까 |
한국방송(KBS)에서 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지고 있다. 길환영 사장이 사실상 여당 후보를 편들며 대선 보도를 문제 삼은 데 반발해 기자들이 제작거부를 결의한 것이다. 사장 취임 전부터 ‘정권 편향 방송’의 우려를 낳았던 길 사장이 취임 열흘 남짓 만에 본색을 드러냈다가 강력한 저항에 부닥친 셈이다.
한국방송 기자협회는 6일 긴급 기자총회를 열고 표결을 통해 제작거부를 결의했다. 대선후보진실검증단에 대한 길 사장의 부당 개입을 규탄하고, 대선 관련 보도의 공정성 확보와 제작 자율성 수호를 위해 제작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안건은 투표자 183명 가운데 174명의 찬성으로 통과됐다. 95.1%의 압도적 지지율이다.
흔히 ‘방송의 꽃’이라 불리는 대선이 코앞에 닥쳤는데도 기자들이 제작거부를 결의할 만큼 길 사장의 행태는 언론의 정도에서 벗어났다. 그는 4일 방송된 대선특별기획 ‘대선후보를 말한다’ 편이 한국방송 이사회에서 여당 추천 이사들로부터 ‘박근혜 후보에게 불리한 내용’이라는 지적을 받자, 프로그램에 편파성의 소지가 있었다며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고 한다. 여당 추천 이사들이 여당 후보를 옹호하려고 프로그램에 시비를 건 것은 명백하게 본분을 넘어선 일이다. 그런데도 길 사장은 프로그램을 변호하기는커녕 맞장구를 쳤으니 스스로 공정성과 중립성을 훼손한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대선후보를 말한다’ 편은 이례적일 정도로 제작과 보도 과정에서 균형에 충실했다는 게 한국방송 내부의 객관적인 평가다. 방송이 나가기 전 심의실에서 3명의 전문가들이 감수를 한 것이 대표적이다. 심의실에서도 아무런 문제제기가 없었는데 길 사장과 여당 추천 이사들은 큰 잘못이 있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박 후보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한 대목은 용납할 수 없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행동으로 볼 수밖에 없다. 박 후보의 선거운동원을 자처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길 사장의 행태는 공영방송 수장이 지녀야 할 자세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그는 애초부터 한국방송을 책임지기에 부적격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지난해 2월 한국방송 새노조가 콘텐츠본부 조합원을 상대로 실시한 신임투표에서 그에 대한 불신임률은 88%에 이르렀다. 티브이 제작본부장, 콘텐츠본부장을 역임하며 정권 편향적 프로그램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사장이 된 뒤에도 ‘대선후보를 말한다’ 편의 방송을 일방적으로 보류시켜 논란을 낳기도 했다. 길 사장은 부당한 대선 보도 개입에 대해 즉각 사과하고 응분의 책임을 져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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