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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죽음의 번호표’ 막을 제도 정비 서둘러야 |
대선 이후 어제까지 벌써 노동자 등 4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참다못해 민주노총 등이 그제 비상시국회의를 열어 노동자들의 죽음을 막기 위해 손해배상과 가압류를 철회하도록 정부와 박근혜 당선인이 나서라고 촉구했다. 은수미 의원 등 민주통합당 ‘진보행동모임’ 소속 의원들과 민변 등 법률가단체도 어제까지 잇따라 관련 법률 개정과 노동정책 전환을 요구하고 나섰다. ‘죽음의 번호표’란 말이 나올 정도로 극한상황에 이르고 있는 상황을 조금이라도 바꾸기 위해 당장 시급한 조처들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자살한 노동자들은 해고 이후 한계상황에 이를 정도로 극심한 생계곤란을 겪어왔다. 특히 한진중공업 해직자 출신의 최강서씨는 회사가 노조를 상대로 건 158억원의 손해배상 소송 판결을 앞두고 있었다. 한진중공업은 지난해 11월 우여곡절 끝에 노조와 합의하면서 손해배상을 최소화하기로 해놓고 여전히 거액의 손배소송을 진행중이다. 최씨가 마지막 순간 부인에게 휴대전화 문자로 보낸 유서에까지 “손해배상 철회하라”고 적은 것은 소송이 얼마나 노동자들을 옥죄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대목이다.
이밖에도 금속노조의 쌍용자동차지부가 237억원, 케이씨(KEC)지회 156억원, 현대차비정규직지회 116억원을 비롯해 문화방송노조 195억원, 철도노조 65억원 등 노조를 상대로 엄청난 액수의 손해배상이 청구돼 있는 상태다.
문제는 법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이런 소송들이 사실상 헌법정신에 정면으로 반하는 악법과 법원의 사용자 편향적 태도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현행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이 ‘근로조건’ 관련 분쟁만 합법파업으로 인정하고 노동자들의 생사를 좌우하는 정리해고를 막기 위한 쟁의조차 모조리 불법으로 간주하고 있는 게 모든 악의 근원인 셈이다.
헌법에 단체행동권을 못박아 놓고 이에 따른 파업을 했다고 거액의 배상금을 물리도록 방치하는 것은 헌법정신에도 반한다. 비폭력 쟁의행위에 따른 손해에는 배상책임을 인정하지 않도록 하는 등 법 개정이 절실하다. 법원 역시 불법 여부가 모호한 상태에서도 사용자 쪽의 가압류 신청을 수용하는 등 노동자 쪽에 불리한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많아 판례 변경 등 태도 변화가 필요하다.
새누리당은 노동자들의 잇따른 죽음에 아직 논평 하나 내놓지 않고 있다. 박 당선인 역시 노동자 죽음을 외면한 채 중소기업인들과 만나 ‘9988’을 외쳐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여당과 박 당선인의 각성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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