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8.16 20:10
수정 : 2005.08.16 20:11
사설
국가권력 남용 범죄에 대해서는 민사·형사상 시효 적용을 배제하겠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을 놓고 찬반 양론이 뜨겁다. 반대론자들은 이런 발언이 헌정 체제와 법률 체계를 뿌리째 뒤흔드는 발상이라고 말한다. 노 대통령과 청와대도 이런 비판을 의식한 듯 뒤늦게 “형사적 소급처벌이 아니다”라고 한발을 빼 혼선을 더욱 부채질하고 있다.
위헌론이든 법적 안정성 저해론이든 나름의 논리야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에서는 형식에만 매몰된 법논리 냄새가 짙게 풍긴다. 고문 사건 책임자들에 대한 처벌요구가 공소시효 완성을 이유로 간단히 묵살되는 현실, 고 최종길 서울대 교수 사건, 삼청교육대 사건 등 과거의 숱한 국가권력 남용 사건 피해자들의 보상 요구가 시효소멸의 벽에 막혀버린 현실에 대한 절실한 고민이 없는 형식적 법률논리는 삭막하기 짝이 없다.
분명한 사실은 국가권력 남용 범죄의 처리는 과거 인권문제뿐 아니라 현재의 인권문제와도 직결된다는 점이다. 나라의 기본 책무는 국민의 생명과 기본권을 보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기본권을 침해하고서도 시효소멸을 이유로 책임을 회피하는 것은 또다른 권리 남용이다. 국가가 인권침해 피해자들에 대해 배상하지 않거나 책임자를 처벌하지 않는 것은 인권보장 의무를 또다시 위반하는 결과가 된다.
일반 형사 사건과 달리 국가의 인권침해 행위에 대해서는 학살이나 전쟁범죄 등 반인륜적 범죄에 시효적용을 배제하는 국제법의 흐름을 원용해야 한다는 법학 이론도 있다. 물론 그런 이론을 적용하기 위한 조건은 엄격하게 규정돼야 할 것이다. 하지만 위헌론만을 내세우는 사람들에게는 헌법이란 과연 무엇인가를 묻고 싶다. 헌법은 이 시대의 정의와 양심의 또다른 표현이다. 정의와 양심을 외면한 법률논리야말로 헌법 정신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정의라는 이름의 물레방아는 느리기는 하지만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는 격언을 다시 상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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