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설] 남북 회담 무산, 반성과 새로운 노력 필요하다 |
6년 만의 남북 고위급 회담이 무산되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정부 대북정책의 방향 설정 및 집행 방식과 관련한 문제점이 여실히 드러난다. 적어도 이번 일에 관한 한 북쪽 태도는 부차적인 변수다.
문제가 된 수석대표의 격 문제와 관련해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과거에 해왔던 것처럼 상대에게 굴종과 굴욕을 강요하는 행태로 하는 것은 남북 관계를 위해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라며 “격을 다르게 해서 합의한 내용을 신뢰할 수 있는가”라고 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발언이다. 장관급 회담을 하자고 한 뒤 차관급 대표를 내놓은 건 우리 정부다. 오히려 북쪽이 굴욕감을 느꼈을 법하다. 지난 9·10일 실무회담의 합의 내용도 장관급 회담을 전제로 하고 있다. 보통 대표가 3명인 차관급 회담과 달리 대표가 5명으로 돼 있고, 북쪽은 ‘상급 당국자’를 단장으로 하겠다고 했다. ‘상’(相)은 장관을 말한다. ‘굴종·굴욕’은 이전 정부의 노력을 깡그리 무시하고 당시 통일부 장관들을 모욕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또한 그래서 예전 합의를 신뢰할 수 없다면 정부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하는 것이 된다. 독단적인 발상이다.
북쪽이 수석대표로 제시한 강지영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 국장이 장관급이냐고 따질 수는 있다. 하지만 북쪽은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했을 뿐이다. 통일부가 없는 북쪽은 이전에도 상황에 맞춰 대표를 제시했고, 강 국장의 직급도 이전 수석대표와 비슷한 수준이다. 이런 관행을 바꿔 엄밀하게 격을 맞추겠다면 일방적으로 밀어붙일 게 아니라 충분한 시간을 갖고 논의해 합의를 이끌어내는 게 정도다. 정부가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이 수석대표로 오지 않으면 장관급 회담을 못하겠다고 결정한 과정도 즉흥적인 것으로 보인다. 남북 관계에 대해 아는 사람이면 대부분 통일부 장관과 김 부장은 격이 맞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북쪽이 받아들일 것으로 봤다면 미숙한 판단이고, 안 될 줄 알면서도 요구했다면 신뢰성 없는 행동이다.
모처럼 다가온 남북 회담 기회가 일단 무산되면서 당분간 냉각기가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회담 재개 노력을 포기해선 안 된다. 지금 남북 관계 개선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면 이명박 정권 때처럼 5년 내내 힘들어질 수 있다. 남북 관계가 풀려야 국제적인 비핵화 노력도 힘을 받는다. 문제가 된 장관급 회담을 피해 실무회담을 내실 있게 하거나 오히려 격을 높여 총리 회담을 추진하는 등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어떤 경우나 양쪽의 적극적인 의지와 상대의 처지를 고려하는 태도는 필수적이다.
‘회담의 폼격’?…차라리 총리급으로 ‘격’ 높여라 [한겨레캐스트 #113]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