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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상식과 이성을 팽개친 ‘NLL 발언록’ 공개 |
참으로 야비하고 치사하다. 새누리당과 국가정보원이 합작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해 북방한계선(NLL·엔엘엘) 포기 발언’을 쟁점화하고 나선 것은 단순히 ‘국면전환용 카드’라는 말로 넘어가기에는 너무 심각하다. 최소한의 정치 도의도, 국가 이익에 대한 고려도, 법에 대한 존중도 내팽개쳤다. 한마디로 이성을 잃었다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이번 사안이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여권의 정치적 꼼수라는 것을 모를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국기문란 행위의 진상을 철저히 파헤쳐 재발 방지책을 세우라는 국민의 여망과는 정반대로 치달았다. 새누리당 의원들은 돌격대로 총대를 메고, 국정원은 불법으로 문건을 내놓고, 청와대는 ‘모르쇠’ 작전을 펼치는 등 철저하게 역할분담도 했다.
여권이 해묵은 엔엘엘 문제를 들고나온 것은 새 정치니, 국민 통합이니, 민생 우선이니 하는 지금까지의 주장이 모두 헛된 구호임을 보여준다. 상황이 다급해지니 곧바로 새 정치 대신 진흙탕 싸움을, 국민 통합보다는 이념갈등 조장을, 민생보다는 정략적 이득을 선택했다. 새누리당은 심지어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엔엘엘 발언에 대한 국정조사를 동시에 실시하자”는 어처구니없는 주장 등으로 정국을 더욱 흙탕물로 휘저어버렸다. 엔엘엘 문제로 보수세력들이 목소리를 높이면서 국민 사이에 치열한 편 가르기, 이념 논쟁이 벌어지는 것도 새누리당은 즐기고 있을 것이다. 박근혜 정부의 정통성이 흔들리고 정국운영의 주도권을 잃는 상황만 모면할 수 있다면 이런 망국적 행태들은 개의치 않겠다는 태도다.
더욱 놀랍고 한심한 것은 청와대의 태도다.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은 어제 “엔엘엘 문건 공개 여부는 청와대가 허락하고 할 문제가 아니다” “정치권 문제는 정치권에서 해결해야 한다”며 발뺌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청와대 행태나 사안의 심각성에 비춰볼 때 이런 말은 전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정부 부처 일을 하나에서 열까지 시시콜콜 간섭하고 지시하는 ‘깨알 청와대’가 국정원의 이런 중요한 결정에 ‘재량권’을 줬다는 것부터 믿기지 않는다. 게다가 이 사안은 다른 것도 아닌 전임 대통령의 남북정상회담 발언 문제다.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운영은 물론 남북관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 사안을 청와대가 몰랐다면 더욱 문제다.
이쯤 되면 박 대통령이 그토록 강조하는 ‘법과 원칙’이 무엇인지 심각하게 묻지 않을 수 없다.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발췌본 열람 행위는 대통령기록물관리법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위다. 새누리당과 국정원 쪽은 국정원에 보관된 대화록은 대통령지정기록물이 아닌 공공기록물이라고 변명하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말이다. ‘원칙’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지금 대통령이 세워야 할 원칙은 국정원의 불법적인 정치개입 행위가 다시는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다짐과 실천이어야 한다. 국정원이 전임 대통령 정상회담 발언록 공개라는 또다른 국기문란 행위로 자신들의 국기문란 행위를 덮으려는 것을 본척만척하면서 법과 원칙을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국가 정상들끼리의 만남에서 오간 발언 내용을 비밀로 보호해야 한다는 것은 국제적인 상식에 속한다. 이것은 최근 남북당국회담 무산 과정에서 여권이 그토록 강조한 ‘글로벌 스탠더드’이기도 하다. 그런데 지금 여권은 앞장서서 한국을 기본도 안 지키는 몰상식한 나라로 만들고 있다. 상식과 이성을 벗어난 꼼수와 무리수는 결국 박 대통령과 현 정권에 부메랑으로 돌아오게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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