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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근혜산성’으로는 촛불을 막지 못한다 |
다시 거리에 촛불의 물결이 출렁이기 시작했다. 지난 주말부터 서울 광화문광장 등에서는 국가정보원의 대선 개입을 규탄하고 정부의 사과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촛불집회가 잇따라 열리고 있다. 대학가에서는 ‘시국선언’이라는, 참으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가 등장해 각 학교로 번져나가고 있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첫 대규모 항의 사태라는 상징성뿐 아니라 확산 속도나 진행 과정 등 모든 면에서 범상치 않은 흐름이다.
촛불과 시국선언을 바라보는 시각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이들의 외침에 적극 공감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보수진영에서는 벌써부터 맞불집회 등으로 훼방을 놓기 시작했다. “전문 시위꾼들의 판에 박힌 불법시위”니 “종북세력의 준동”이니 하는 따위의 비판도 어김없이 등장했다. 정부 여당은 일단 촛불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이지만 기본적으로 이런 시각에서 벗어나 있지 않은 듯하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촛불을 일부 시위꾼들의 기획작품이나 반대파들의 음모 따위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사태의 본질을 놓친다는 점이다. 국정원 국기문란 사건으로 드러난 우리 사회의 부조리와 비상식에 대한 일반 국민의 충격과 분노는 오히려 야당이나 언론 등을 훨씬 능가한다. 이는 촛불 및 시국선언의 참가자들이 누구인지에서도 입증된다. 촛불집회는 애초 20대 여성들의 온라인 친목 카페가 운을 떼어 열린 플래시몹에서 싹이 터서 대학생들이 주도하는 집회로 진화돼 왔다. 시국선언도 서울대 총학생회 등 이른바 비운동권 학생회가 앞장서 시작한 뒤 대학동문회, 종교계 등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2008년 광우병 쇠고기 촛불집회가 10대 여학생들이 주도하다 점차 폭넓은 계층으로 확산된 것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사태의 본질이 이런 만큼 정부의 의도적인 무시나 경찰력을 앞세운 강경대응은 결코 올바른 해법이 아니다. 교통 방해니 집회 미신고니 하는 위법행위를 국정원의 정치 개입이라는 거대한 불법행위에 비교해 보면 ‘법치’라는 말부터 허망해진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해 북방한계선(엔엘엘) 포기 발언’ 논쟁으로 촛불을 잠재울 수 있으리라고 여기는 것도 착각이다. 국민은 엔엘엘 쟁점화의 정략적 노림수를 모를 만큼 어리석지도 않고, 이 문제로 국정원 사건을 잊을 정도로 기억력이 나쁘지도 않다.
지금이야말로 정부가 진정한 소통과 대화 능력을 보여야 할 때다. 국민이 왜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왔는지를 성찰하고, 그 뜻을 따를 방안이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이 땅에 상식과 민주주의를 복원하자는 국민의 열망은 결코 ‘근혜산성’을 쌓아서는 막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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