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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대법원의 고엽제 판결이 아쉬운 이유 |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고엽제 피해자들이 다우케미컬 등 미국 제조사를 상대로 낸 재판 최종심에서 대부분 패소했다. 대법원이 인정해준 거라고는 소송에 참가한 1만6579명 가운데 염소성 여드름 피해자 39명뿐이다. 평생을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한 가닥 희망을 부여잡고 14년을 기다려온 고엽제 피해자들에겐 너무나 안타까운 결과다.
이런 결과가 나온 건 대법원이 너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 탓이 크다. 항소심에서는 참전군인들이 이겼는데, 대법원에서는 고엽제와 질병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받지 못했다. 2심 재판부는 미국 국립과학원 보고서를 기준으로 염소성 여드름은 물론 당뇨병, 폐암, 후두암 등 11가지 질병과 고엽제 노출 사이의 ‘역학적 인과관계’를 인정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런 질병은 술 담배나 집안 내력 때문에도 걸리는 건데, 꼭 베트남 고엽제 때문이라고 할 수 없다’는 취지의 이유를 대며 원심 판단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민사소송의 경우 원고가 피고의 불법행위를 입증해야 하는 게 원칙이다. 하지만 고엽제의 경우 그 성분이나 후유증 등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은 주로 미국에서 연구가 이뤄진 만큼 미국 제조사 쪽에 정보가 훨씬 많은 게 현실이다. 전문성을 필요로 하는 의료소송에서 병원 쪽에 입증책임을 돌리는 최근의 판례 경향도 이런 정보의 비대칭성 때문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대법원이 너무 엄격하게 판단을 내렸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 아쉬운 것은 고엽제 피해자들이 미국 사법부의 판단을 받을 기회를 아예 차단해 버린 점이다. 참전군인들은 한국에서 재판에 이긴 뒤 이를 근거로 미국에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할 예정이었다. 한국의 대법원이 최종 재판이 아니라, 미국에서 4심, 5심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대법원이 고엽제 피해자들의 주장을 배척해 버림으로써 이런 기회 자체가 봉쇄돼 버렸다.
재판은 끝났지만 정부 책임이 사라진 건 아니다. 정부는 ‘고엽제후유의증 환자지원 등에 관한 법률’에 근거해 의료지원 등을 하고 있지만, 그 금액이나 처우가 너무나 초라하다. 이제 피해자들이 손해배상을 받을 길마저 막힌 만큼 정부가 나서 지원을 확대하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특히 최근 고엽제전우회 회원들은 “1984년 고엽제 피해자 소송 과정에서 미국 쪽이 ‘미국 다음으로 한국에서 많이 참전했으니까 피해자들은 소송에 참여하라’고 요청했는데 전두환 정부가 ‘한국에는 피해자가 없다’며 이를 묵살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주장이 사실이라면 정부는 이에 따른 법적·도의적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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