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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전작권 환수’ 재연기 요청, 주권국가 맞나 |
박근혜 정부가 이명박 정부 때 한 차례 연기한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의 환수 시기를 다시 연기해 달라고 미국에 요청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명박 정부가 2009년 북한의 2차 핵실험을 빌미로 전작권 환수 시기를 2015년 12월로 연기한 데 이어, 박근혜 정부가 올해 2월 3차 핵실험을 이유로 다시 연기해 달라고 매달리는 꼴이다. 한 나라 주권의 핵심이자 마지막 보루인 자국 군대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미국이 계속 맡아 달라는 얘기인데, 주권국가로서 얼굴이 화끈거리는 일이다.
우리나라 헌법 제66조(대통령의 지위·책무·행정권) 2항은 “대통령은 국가의 독립, 영토의 보전, 국가의 계속성과 헌법을 수호할 책무를 진다”고 되어 있다. 군대는 바로 대통령이 이런 책무를 수행하는 데 행사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다. 전시에 군대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행사하지 못한다는 것은 자기 나라와 국민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남의 손에 맡기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세계에서 자기 나라 군을 자기 나라가 지휘·통제하지 못하는 나라를 찾아보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지원하기 위해 온 명나라군이 조선의 군권을 쥐고 횡포를 부린 역사만 되돌아봐도 한 나라가 군권을 스스로 행사하는 게 얼마나 엄중한가를 알 수 있다.
우리나라도 이승만 대통령이 북한의 침략으로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던 1950년 7월14일, 당시 유엔군사령관에게 군 작전지휘권을 양도한 이래 주권 회복 차원에서 전작권을 환수하려는 노력을 꾸준히 펼쳐왔다. 김영삼 정권 때인 1994년 평시작전권을 돌려받았고, 노무현 대통령 시절엔 전시작전권을 2012년 4월까지 환수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그러나 보수성향의 이명박 정권 때부터 흐름이 역류하기 시작했다. 보수세력은 그때마다 북한의 핵위협을 연기 명분으로 제기했는데, 이는 사실상 북핵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 무기한 군사주권을 포기하겠다는 논리다. 북한과 국력 차이가 40배 가까이 나고, 미국이 전작권을 돌려주는 데 부정적인 것도 아닌 현실을 고려하면, ‘뼛속까지 스며든 미국 의존증’의 발로라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전작권 재연기를 다루는 과정의 비밀주의와 불투명성도 묵과하기 어렵다. 박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의 외교안보 책임자 어느 누구도 미국에서 이번 일이 불거지기 전까지 단 한 번도 2015년 12월로 예정된 전작권 환수 시기의 변경 가능성을 내비친 바 없다. 박 대통령이 대선공약까지 내걸고 한-미 정상회담에서 이행을 확인까지 한 사안을 이런 식으로 물밑에서 은밀하게 추진하는 것은 대국민 사기 행위이다. 떳떳하지 못함을 자인하는 것이다. 박 정권의 방침이 변경된 데는 남재준 국정원장(육사 25기)-김장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27기)-김관진 국방장관(28기)으로 이뤄진 외교안보 진영의 수직적 계급문화가 작용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무엇보다 국익을 우선해야 할 외교안보 문제가 육사 기수에 휘둘린다면 심각한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외국과의 거래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르게 되어 있다. 벌써 미국이 우리의 재연기 요구를 고리로 방위비 협상, 원자력 협상, 차세대 전투기 사업, 미사일방위 참여 등에서 우리 쪽의 대폭 양보를 요구하고 나올 것이라는 관측이 무성하다. 청소년 탈북자 북송 사건이 일어난 라오스에 대한 내년도 공적개발원조액이 2배로 껑충 뛴 사실은 공짜 없는 국제사회의 냉엄한 현실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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