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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보수 공개 회피하는 재벌 일가의 도덕적 해이 |
경영에 참여하고 있는 재벌 총수 일가들이 등기이사직에서 속속 물러나고 있다고 한다. 이달 말부터 법이 개정돼 등기이사로 연봉 5억원 이상을 받을 경우 보수가 공개되기 때문이다. 그동안 총수 일가라는 이유 하나로 다른 이사들에 비해 훨씬 많은 보수를 챙겨온 재벌들의 도덕적 해이 실상이 고스란히 드러난 셈이다.
문제는 등기이사에서 물러난다고 해서 경영에서 손을 떼는 게 아니라 미등기임원 등 법망을 피해 우회로를 찾아가는 데 있다. 이런 식이라면 주주들의 경영진에 대한 감시 제고라는 입법 취지가 빛바랠 수밖에 없다. 금융당국은 법이 무력화되는 현실에 손 놓고 있을 게 아니라 보수 공개 기준을 더욱 엄격히 해야 한다.
국내 금융회사 최고경영자 가운데 가장 많은 보수를 받은 조정호 메리츠금융그룹 회장이 지난 한 해 지주사와 계열사에서 모두 90억원을 받은 데서 보듯 재벌 총수 일가들은 경영 참가 대가로 엄청난 보수를 챙겼다. 지금은 등기임원 전체에게 지급되는 보수 총액과 1인당 평균 액수만 공개돼 총수 일가의 몫이 정확히 얼마인지 알 수 없지만, 앞으로는 보수가 5억원 이상이면 개인별로 기재해야 한다. 등기이사 간에도 보수 격차가 많게는 10배 수준이나 난다고 하니 총수 일가가 사실상 회사의 부를 증여받아온 셈이다.
재벌 총수들이 등기이사를 맡지 않을 경우 고액의 연봉을 받더라도 공개 의무를 벗어나는 문제점이 있다. 또 등기이사는 기업의 핵심 경영진으로 권한과 책임이 분명하지만 우회적으로 경영에 참여할 경우 경영 실패나 불법 행위가 발생하더라도 법적 책임을 묻기가 어렵게 된다. 금융위원회가 등기이사의 개별 보수를 근로, 퇴직, 기타소득으로 구분해 기재하는 것만 의무화하고, 세부적인 보수 산정 기준 및 방법의 공개는 회사 자율에 맡기는 등 여지를 남겨둠으로써 결국 우회로를 열어준 셈이 됐다. 지금도 등기임원이 아닌 형태로 경영에 참여하는 재벌 총수 일가가 5명 중 1명꼴이라고 한다. 이렇게 해서는 일부 임원에 대한 비정상적인 고액 보수 지급 관행이 개선되고 임원의 성과에 따라 적절한 보상이 이뤄지기를 기대하기 어렵다.
임원 보수를 제한하고 보수를 공개하는 것은 금융위기 이후 세계적인 흐름이다. 재계는 사생활 침해와 노사갈등을 이유로 보수 공개에 반대해왔지만 세계적인 추세에 비춰볼 때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다. 금융위는 제도가 정착되는 것을 봐가면서 보수 공개 범위를 확대하겠다는데 그럴 일이 아니다. 법망 회피가 이뤄지고 있는 만큼 바로 보완책을 마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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