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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조선’적 재일동포의 역사적 특수성 무시한 판결 |
대법원 제3부(주심 박보영)는 12일 ‘조선’적 재일동포 3세인 정영환씨가 오사카총영사의 여행증명서 발급 거부 처분을 취소해달라고 낸 소송에서 피고 쪽인 오사카총영사의 손을 들어줬다. 재일이라는 역사적 특수성에서 기인한 무국적자 신분인 조선적 재일동포를 사실상 한국인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몰역사적이고 비인도적인 판결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적은 일제강점기에 징병·징용 등으로 일본에 건너간 재일동포 가운데 해방 이후 대한민국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적을 취득하지 않고 무국적으로 남아 있는 재일동포를 말한다. 북한의 국호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비슷하기 때문에 총련계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으나, 원칙적으로 조선적은 북한 및 총련과 관계가 없다. 예를 들어 프로축구팀 수원 삼성에서 공격수로 뛰고 있는 정대세 선수는 아버지의 국적을 따라 한국적이지만 어머니는 조선적을 유지하고 있다. 이렇듯 재일동포 사회에는 생활의 편의나 민족적 자존심, 통일에 대한 열망 때문에 남북 어느 쪽의 국적도 취득하지 않고 생활하고 있는 동포가 많다.
정영환씨는 2009년 4월 민족문제연구소가 주최한 한-일 공동 심포지엄에 참석하기 위해 주오사카 한국총영사관에 여행증명서 발급을 신청했으나 신원증명이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부되자 취소 소송을 냈고, 1심에서 승소를 했다. 1심인 서울행정법원은 2009년 12월 “처분 사유가 존재하지 않거나 합리적 재량권의 범위를 일탈, 남용한 처분이므로 위법하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국가인권위원회도 조선적 재일동포에 대한 임시여행증명서 발급 때 국적 전환을 강요 또는 종용하거나 이를 조건으로 하는 관행을 시정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수립하라고 외교통상부 장관에게 권고했다. 그러나 2심인 서울고등법원은 이듬해 9월 총영사의 광범한 재량권을 인정하며 1심을 뒤집었고, 대법원도 이를 추인했다.
대법원 판결은 사실상 정부에 조선적 재일동포의 국내 출입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줌으로써, 조선적 재일동포의 국적 선택 결정권과 양심의 자유를 크게 훼손할 여지를 열어놨다. 즉, 정부가 여행증명서 발급을 무기로 국적 변경을 강요해도 조선적 재일동포가 저항할 수단이 없게 됐다. 더욱 심각한 건 이번 판결이 해방 이후 60여년간 일본 사회에서 차별을 받으며 조선인으로서 정체성을 지켜온 조선적 재일동포의 피나는 역사와 현실에 눈을 감고 있다는 점이다. 이 판결로 정부의 재일동포 정책은 곧 ‘기민정책’이라는 말이 더욱 무성해질 것 같아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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