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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이제는 역사에 전진기어를 넣어야 한다 |
‘드디어’ 새해다. 2014년 새해 아침이 이토록 각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지난 한 해가 이 땅의 백성들에게 너무도 길고 고단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지난해 연초에는 경제민주화와 복지 그리고 평화가 구현되는 국민행복시대를 열겠다고 약속한 새 정권에 일말의 기대가 있었다. 적어도 역사적 퇴행을 거듭한 이명박 정권의 5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리란 바람을 가졌던 것이다. 그러나 그 기대는 철저한 배신으로 되돌아왔다. 경제민주화나 복지는 대선을 위한 눈가림용 구호였음이 판명났다. 대선 승리를 위해 차용했던 가면을 벗어던진 박근혜 정권의 본색은 이명박 정권보다 더 퇴영적이고 더 몰역사적이었다.
나홀로 인선을 통해 극우 논객 윤창중을 대변인으로 발탁한 데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정권의 극우적 색채는 공안검사 출신을 총리 등 주요 요직에 포진시킨 데 이어 유신헌법을 기초한 김기춘을 비서실장에 등용함으로써 그 정점을 찍었다. 극우지배체제 아래서 정치는 실종되고 1년 내내 공안정국이 휘몰아쳤다. 민주주의의 기본인 국민참정권을 유린한 국가기관의 대선개입 의혹이 밝혀지는 것을 막기 위해 검찰총장을 찍어내고 1년 내내 종북몰이로 비판세력에 재갈을 물리려 했다. 선거 때 재미를 본 북방한계선 논란을 다시 끄집어낸 것도 모자라 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하는 외교적 폭거까지 저질렀다. 극우의 눈에는 노동조합도 분쇄의 대상일 뿐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해충’이라고까지 표현했던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 노조 아님을 통보하고 세밑에는 민주노총 본부까지 유린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의 극우세력에게서조차 비웃음을 사는 역사교과서를 검정 통과시킨 것도 이 정권이었다.
집권 반년도 안 돼 경제민주화 공약을 내던져버린 박 정권은 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은 세운다는 ‘줄푸세’의 본색으로 돌아갔다. 끊임없이 철도를 비롯한 주요 공기업의 민영화를 기도하고 의료기관에 영리사업을 허용하는 등, 2008년 금융위기로 한계가 드러난 시장만능주의로 회귀해버린 것이다. 그 덕에 재벌들은 배를 불렸지만, 국민들은 1000조원을 돌파한 가계부채에 짓눌려 신음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부가 키운 위기가 폭발할 위험도 없지 않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른 데는 정권이 거꾸로 가는 폭주기관차가 되도록 방치한 정치권의 무능도 한몫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집권여당은 일찌감치 정권의 시종으로 전락했고, 야당은 제대로 된 대안도 제시하지 못한 채 그런 집권세력에 끌려가는 무기력만 연출했다. 세밑 ‘안녕들 하십니까’란 한 대학생의 물음에 안녕치 못하다는 대답이 전국을 뒤덮은 것은, 어디에도 마음 두지 못하고 지난 1년을 견뎌온 우리 국민들의 안타까운 현실을 보여준다.
이제 정치권은 안녕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소리에 응답해야 한다. 우리는 더 물러설 곳이 없다. 벼랑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전진기어를 넣고 역사를 앞으로 전진시켜야 한다. 그 일차적 책임은 대한민국호의 기관사 박근혜 대통령에게 있다. 지난 1년간 박 대통령이 보여준 모습은 아버지의 한풀이를 하는 복수의 여왕 같았다. 그러나 5년을 한풀이로 보낼 순 없다. 박 대통령에게는 ‘박정희 시즌 2’가 아닌 본연의 역사적 책무가 있다. 21세기하고도 10년이 훨씬 지난 이 시점에 역사가 그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분명히 인식하고 그 책무를 감당해야 한다.
지금 한반도 주변은 걷잡을 수 없이 소용돌이치고 있다. 아베 정권의 일본은 재무장의 길로 들어섰다. 지역강국으로 부상한 중국은 방공식별구역을 일방적으로 선포하는 등 군사적 힘을 과시하려 든다. 아베 총리는 중국에 맞서는 것이 일본의 세계에 대한 기여라고 도발하고, 중국은 일본과 영토분쟁을 빚고 있는 댜오위다오(센카쿠열도)를 사수하기 위해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태평양으로의 귀환을 선언한 미국은 베팅 제대로 하라며 우리를 압박한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질 수도 있는 위기다. 이런 국제적 갈등의 파고를 무사히 넘으려면 우리 내부의 안정을 유지하고 북과의 협력관계를 구축하는 게 긴요하다.
박 대통령이 올해부터 새로운 임기를 시작한다는 자세로 새출발하지 않고는 힘든 일이다. 가장 시급한 것은 극우세력과의 단절이다. 최근 각종 여론조사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중도층의 이반은 극우에 휘둘려 국민 대다수를 소외시킨 데 대한 반발의 표현이다. 그를 대통령에 당선시켰던 합리적 보수세력을 다시 껴안고, 외연을 확대하는 통합적 리더십을 보여야 한다. 야당을 위시한 시민사회의 비판적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등 소통을 위한 노력도 배가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국민 다수의 지지가 바탕이 돼야, 제2인자까지 처형해야 할 정도로 위태롭고 불안정한 북한과의 관계를 안정시키면서 평화와 상생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
박 대통령이 시대의 소명을 제대로 수행하도록 견인할 책임은 야권 등 진보개혁진영은 물론 시민 각자에게도 있다. 깨어 있는 정신으로 집권세력을 감시하고 국민의 안녕과 행복에 대한 그들의 책무를 끊임없이 환기시켜야 한다. 우리의 노력과 수고 없이 더 나은 삶이 저절로 주어지는 일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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