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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국가의 위헌적 행위에 면죄부를 준 위험한 판결 |
유신시절 박정희 정권의 독재에 저항하던 수많은 시민이 긴급조치를 근거로 영장 없이 체포·구속·압수수색을 당하고 유죄판결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그런데 여기에 가담한 수사기관과 사법부의 행위가 불법이 아니라는 대법원 판결이 30일 나왔다. 소름이 끼치는 판결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대법원은 앞서 두 차례에 걸쳐 긴급조치 1·9호가 유신헌법에 비춰봐도 위헌이라고 판단했으면서도, 이번엔 ‘긴급조치가 당시로서는 유효한 법규였던 만큼 이를 따른 공무원의 직무행위가 곧바로 불법행위에 해당하는 건 아니다’라고 판시했다. 긴급조치가 허용한 영장 없는 체포·구금보다 더 나아가 고문·폭행 등의 추가적인 위법행위를 했어야만 불법행위가 된다는 것이다. 당시 피해를 입은 시민들은 이제 가혹행위를 당했음을 입증하지 않는 한 국가로부터 손해배상을 받기 어려워질 전망이다.
대법원의 태도는 긴급조치라는 위헌적인 법규를 만든 것 자체가 국가의 불법행위였다는 ‘숲’은 보지 않고, 공무원이 실정법을 따른 것일 뿐이라는 ‘나무’만 보는 형식논리의 극치다.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가를 탄압한 경찰이나 나치의 유대인 학살 지시에 순응한 군인들이 실정법과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며 반성하지 않는 태도와 일맥상통하는 논리이기도 하다. 국가가 중대한 인권침해 행위를 저질렀을 경우 주도 세력은 물론 종속적 역할을 한 이들도 일정한 요건에 따라 책임을 지워야 한다는 국제법 원칙과도 어긋난다. 무엇보다 위헌적인 긴급조치를 발동한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공무원으로서 불법행위를 한 게 아니고 뭔가. 법의 외피를 쓴 채 폭압적으로 인권을 유린한 독재체제에 면죄부를 준 반역사적 판결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이번 판결은 과거를 넘어 현재와 미래를 향해서도 그릇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위험하다. 앞으로 헌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입법으로 국민의 권리를 침해하더라도, 이를 수행한 공직자는 불법행위를 한 게 아니며 국가도 책임을 면할 수 있다는 암시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초헌법적인 독재와 인권유린의 아픈 역사를 힘겹게 극복해가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인권의 최후 보루라는 대법원이 이런 판결을 내놓는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양승태 대법원장이 취임한 뒤 대법원의 보수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 지 오래다. 특히 과거사 청산과 관련해선 최근 들어 시대를 거스르는 판결을 잇달아 내렸다. 그러나 이번 판결은 그 정도가 지나치다는 판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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