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10.04 20:22
수정 : 2005.10.05 15:11
사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부가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를 비롯한 이건희 삼성 회장 자녀 4명에게 삼성에버랜드(옛 중앙개발) 전환사채를 헐값에 넘긴 에버랜드 당시 임원들의 업무상 배임죄를 인정했다. 주당 8만원을 웃돌 것으로 추산되는 전환사채를 1996년에 이 회장 자녀 4명에게 7700원이라는 헐값에 넘겨 회사에 손해를 끼친 혐의를 이제서야 인정한 것이다. 이 회장 자녀의 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인수는 삼성그룹 경영권 대물림 과정의 결정판이다. 이를 통해 이 회장의 외아들 이 상무는, 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카드-에버랜드로 이어지며 삼성그룹 순환출자 구조의 정점에 있는 에버랜드의 실질적 대주주로 올라섰다.
삼성의 ‘세금 없는 대물림’이 직접 선고 대상은 아니었다 해도, 핵심 과정의 불법성이 인정된 만큼 그 역시 정당성을 잃었다고 보는 게 옳다. 상식적 판단은 이미 나 있었다. 이 상무가 삼성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에 오르기까지 낸 세금은 16억여원에 불과했다. 1995년 말 부친인 이 회장한테서 종잣돈으로 받은 60억8천만원에 대한 증여세가 전부다. 삼성은 이 종잣돈이 불려지게 비상장 계열사 주식을 잇달아 헐값에 넘겨주는 등 그룹 차원에서 밀어줬고, 이 상무의 재산은 수조원으로 불어났다. 삼성이란 기업의 자산이 이 상무 손으로 넘어간 것이다. 편법이고 부도덕한 혐의가 매우 짙은 이 변칙 사전 상속이 끼친 사회적 해악은 ‘관행’으로 여길 수 있는 수준을 크게 넘어선 것이다. 이를 보고 어느 재벌이나 국민인들 세금을 제대로 내려 하겠는가. 남은 것은 법적 강제력을 적용할 수 있을지였는데, 법원이 인정한 셈이다.
에버랜드 임원에 대한 업무상 배임죄 인정은, 이 상무 등 이 회장 자녀들이 부당이득을 올렸다는 것의 다른 표현이다. 본격수사를 머뭇거리며 법원의 판단을 지켜보겠다던 검찰이 앞으로 어떻게 처리할지 지켜볼 일이다. 또한 에버랜드의 당시 전환사채 발행 의결과 배정 과정에서 여러 불법성이 드러난 점도 그냥 넘길 수 없다. 발행과 배정 자체가 무효라는 논란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법적 처리 여부를 떠나 삼성은 마땅히 도덕적 책임을 느껴야 한다.
삼성이 답을 내야 할 때가 됐다. 1심 선고일 뿐이고, 이 문제가 곧 이 상무 등의 지분 취득 불법성까지 인정한 것은 아니라고 항변하는 건 떳떳하지 못하다. 총수의 편법 상속 과정에 전문 경영인들이 잇따라 범죄자로 전락하는 일을 외면하는 것도 도리가 아니다.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의 전향적 결단을 촉구한다. 기업 활동이 위축되지 않고, 개인의 정당한 재산권도 보호받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결단은 이건희 회장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경영권의 집안 승계가 어려워질 수도 있다. 하지만 제왕적 총수라는 봉건적 틀에 대한 집착만 버리면 방도는 얼마든지 있을 것으로 본다.
다른 재벌들도 자유롭지 못하다. 삼성을 본받아, 비상장사나 전환사채 등을 이용해 세금 없는 대물림을 해 왔다. 이 부분도 가려 잘못된 것은 바로 잡아야 한다. 이런 일까지 반기업 정서 운운하며, 기업을 못살게 구는 것이라고 왜곡해서는 안 된다. 재벌 승계 과정만 투명해져도 우리 경제 체제는 한단계 도약할 수 있다. 정부도 뒷북만 치지 말고 재벌의 변칙 상속을 근원적으로 막을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겠지만, 먼저 재벌 스스로 바른길을 걷겠다는 각성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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