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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1.31 19:43 수정 : 2005.01.31 19:43

노무현 정권이 색깔을 바꿔가고 있다. 개혁에서 실용주의로! 지난해 하반기부터 이미 이런 조짐을 보였는데, 올 들어 간판을 아예 실용주의로 갈아치운 듯하다. 물론 실용주의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소모적인 공리공론이 난무하는 우리 현실에서는 오히려 권장할 만한 것이다. 실용주의는 말 그대로 어떤 정책이나 태도가 현실에서 얼마나 효율적이고 유용하냐를 주된 판단 기준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열린우리당이 내세우는 ‘실용주의적 개혁’도 원론적으론 가능하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현정권이 실용주의로 급선회한 까닭을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다. 우선 먹고사는 문제가 시급하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일 터이다. 특히 지지기반인 서민층들의 삶이 상대적으로 훨씬 더 피폐해지는 상황을 더는 방치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 지난해 정기국회의 악몽에서 벗어나고 싶기도 했으리다. 4대 개혁입법 처리를 놓고 온갖 헛수고만 하다 상처만 입었던 과거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실용주의를 표방하면서 야당과 타협하며 하나라도 성과를 내겠다는 욕심을 부릴 만도 하다.

그렇지만 지금, 노 정권의 변신 움직임은 상황 인식과 접근 방식이 잘못됐다. 실용주의는 주어진 여건이 어떠냐에 따라 개혁을 위한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지만 반대로 야합과 변절로 전락할 수도 있다. 그 자체가 추구해야 할 어떤 절대적 가치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노무현 정권 변신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의 역학구도를 다시한번 되새길 필요가 있다. 〈중앙일보〉 사주를 주미대사로 발탁하는 등 보수층 껴안기 노력을 하고 있지만 주변 여건은 집권 당시와 본질적으로 달라진 게 없다. 사사건건 반대만 일삼는 야당이 건재하고, 재벌들은 집요하게 정부 길들이기에 매달리고 있으며, 기회만 있으면 노무현 정부를 물고늘어지는 보수언론의 기세도 여전하다. 이런 상황 속에서는 실용주의를 통한 진정한 타협을 기대하기 어렵다. 상대가 조금도 변하지 않았는데 뭘 주고받겠다는 것인가. 일방적으로 포기하고, 야합하고, 현실에 안주할 뿐이다. ‘실용주의적 개혁’이 자리잡을 수 있는 토대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표방하는 실용주의는 필연적으로 이런 결과를 초래한다. 국가보안법 처리 유보, 분식회계 면탈 등 이미 그런 움직임은 가시화하고 있다.

노무현 정권이 실용주의로 변신하는 데는 사회 전반에 퍼진 ‘개혁 피로증’에 대한 우려도 한몫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현실적으로 개혁에 대한 반감이 존재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내용을 구분해 봐야 한다. 개혁에 대한 기득권층의 반발은 이미 예상된 일이다. 이는 부딪쳐가며 이겨내야 할 대상이지 흥정의 대상이 아니다. 노무현 정권이 그런 일 하자고 집권한 것이고, 지지자들도 그런 일 하라고 밀어준 것 아닌가. 대통령이 됐다고 모든 계층의 대표를 자처하며 그들의 이익을 골고루 충족시키려는 유혹에 빠지는 순간, 선거 과정에서의 치열했던 열기는 의미를 잃게 된다.

지지기반인 서민층의 등돌림은 좀더 복합적이다. 이들의 반발은 일차적으로 먹고사는 문제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하다. 지지해주었더니 내 배만 더 곯게 하는데 누가 좋아하겠는가. 그러나 그들의 배고픔을 실용주의를 통해 해소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먹고사는 문제를 실용적으로 해소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재벌이나 부유층 등 경제적 기득권층의 ‘사기를 북돋아주면서’ 그들의 주머니를 풀게 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이 단기적으로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길게 보면 오히려 사태를 더 악화시킨다. 누구를 위한 실용주의인지를 엄밀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서민층의 개혁 피로증은 개혁 과정에서의 미숙함에 대한 반발이지 개혁 그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아님도 알아야 한다.

노무현 정권은 자신들이 표방한 실용주의가 우리 현실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정확하게 파악하는 게 우선이다. 그 의미를 알면서도 이를 ‘실용주의적 개혁’이라고 강변한다면 지지층을 속이는 짓이다. 얻는 것보다 잃을 게 더 많은 ‘비실용주의적 야합’이 아닌지 되돌아볼 일이다.

정석구 논설위원 twin8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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