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11.23 20:34
수정 : 2005.11.23 20:34
사설
그제까지는 대학 수학능력 시험 준비에 밤잠을 설쳤고, 어제부터는 안타까움과 실망에 잠 못 이루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수고했다. 미안하다!’
그러나 두렵다. 아이들의 노기 띤 얼굴이 먼저 떠오른다. 정글(시험)에 내던져, 피투성이 싸움에 길들게 해놓고 이제 와서 미안하다고? 한두 해였나, 짧게는 고교 3년, 혹은 중·고교 6년, 길게는 초·중·고 10여년 동안 진을 다 빼놓고 이제 와 수고했다고? 한 사람의 운명을 좌우할 평가를 한 번의 필답고사로 결정하겠다면서 미안하다고?
다채로운 색과 무늬와 형태가 어울릴 때 세상은 좀더 풍부하고 아름답고 윤택해진다. 교육은 그렇게 아이들 각자의 장점과 개성을 살리고, 서로 다른 것들이 조화하는 법을 가르친다. 그러나 사회에서 이뤄지는 일이란, 학벌에 따른 차별이다. 더 좋은 직장, 대우, 신분은 학벌에 좌우되니 누가 시험에 온몸을 던지지 않을까. 심지어 어떤 이들은 인재가 국민을 먹여 살리니, 시험의 그물망을 좀더 촘촘하게 제도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입시제도를 강화하자는 것이다.
사람이 일생을 통해 체득하는 것은 두 가지라고 한다. 사랑하는 것과 이해하는 것, 행복해지는 법이다. 객관적이라는 것말고는 내세울 게 없는 필답고사는 사랑과 이해의 능력을 가늠하지 못한다. 그 점수는 행복의 역량과 무관하다. 그런 제도와 점수 앞에서 주저앉을 순 없다. 행복은 인정받고 존중받는 존재감에서 온다고 한다. 누구나 서로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 중요한 건 뜻과 의지다.
아이들이 있어 세상은 존재한다. 큰소리 치는 어른들도 머잖아 아이들의 부양을 받게 된다. 그런 아이들을 성적순이라는 붕어빵 기계 속에 밀어넣었으니, 그저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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