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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6.24 18:27 수정 : 2018.06.24 19:44

1989년 10월9일 당시 김대중(오른쪽부터) 평화민주당 총재,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가 회담을 열고 연내 5공 청산을 다짐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89년 10월9일 당시 김대중(오른쪽부터) 평화민주당 총재,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가 회담을 열고 연내 5공 청산을 다짐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파란만장한 삶을 마치고 영면에 들었다. 정치권에선 산업화와 민주화에 모두 공헌한 ‘정치 거목’이라는 찬사를 쏟아냈다. 정부도 국민훈장 가운데 최고인 무궁화장 추서 방침을 밝혔다. ‘제이피’(JP)로 더 친숙한 그의 삶은 ‘영원한 2인자’ ‘정치 9단’ ‘처세의 달인’ 등 따라붙던 별칭만큼이나 영욕이 교차했다.

김대중·김영삼 두 전직 대통령과 함께 ‘3김 시대’의 한 축을 맡은 그가 한국 현대사에 남긴 족적은 크다. 1960~70년대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을 통해 산업화를 진전시키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 지난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선 김대중 전 대통령과 ‘디제이피(DJP) 연합’을 통해 첫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뤄내 정치 발전에도 기여했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이 불거진 2016년에는 “박정희 대통령, 육영수 여사, 나쁜 점만 물려받았다”며 박근혜 전 대통령을 비판했다.

그러나 그가 드리운 그림자는 훨씬 크고 깊다. 육군 중령이던 1961년 그는 처삼촌 박정희와 5·16 쿠데타를 일으켰다. 4·19 혁명을 짓밟고 인권 유린의 상징인 중앙정보부를 창설해 초대 부장이 됐고, 공화당 창당을 주도해 유신독재의 길을 닦았다. 중앙정보부는 고문·조작, 정치 개입, 김대중 납치사건 등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그는 1972년 10월 유신 선포 전후로 4년6개월간 총리를 지냈다. 그가 대일 청구권 문제를 졸속 합의한 한-일 국교정상화는 ‘6·3 시위’를 불렀고, 아직도 한-일 관계의 걸림돌로 작용한다.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해 1987년 대선에 출마한 그는 이후 지역감정을 이용하고 부추겼다. 특히 1990년 노태우·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한 ‘3당 합당’은 거대 민자당 대 호남에 기반을 둔 평화민주당의 대결 구도를 만들고, ‘영남보수 패권주의’를 굳어지게 했다. 민자당을 탈당해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한 그는 1995년 6·27 지방선거에서 ‘충청도 핫바지론’으로 지역감정을 노골화하며 충청권 맹주로 정치 생명을 이어갔다.

그는 영남보수 패권에 기댄 자유한국당이 사실상 궤멸하고, 부산·울산·경남에서 민주당 광역단체장이 당선되는 등 국민들이 지역주의를 깬 6·13 지방선거 열흘 뒤 별세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정치인으로 그를 추모하는 것을 탓할 이유는 없다. 다만, 최고 훈장을 추서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정부는 통합의 상징성을 의식했을 수 있다. 하지만 최종 결정에 앞서 ‘반대 청원’ 등에 담긴 비판 여론도 유념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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