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12.06 21:30
수정 : 2005.12.06 21:30
사설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동유럽 등지에 비밀리에 운영 중인 국외 비밀수용소의 실체가 서서히 드러나고 있다.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은 유럽 순방길에 “테러 용의자를 다른 나라로 이송해 조사하는 것은 국제법에 어긋나지 않으며, 이는 테러와의 전쟁에서 무고한 생명을 구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유럽연합의 진상조사 압력이 커지자, 그동안 긍정도 부정도 않던 비밀수용소의 존재를 사실상 처음으로 인정한 셈이다.
나아가 미국 정보 요원들이 테러 용의자를 비밀수용소에 불법적으로 이송·구금하는 것을 유럽 쪽 여러 나라들이 적극적으로 협조하거나 묵인했다는 보도도 잇따르고 있다. 영국은 물론 독일, 아일랜드, 포르투갈, 스페인 등이 비밀수용소로 가는 중앙정보국 비행기의 영공 통과나 기착을 수시로 허용했다고 한다. 미국의 일방주의를 비판해온 서유럽 나라들조차 미국 정보기관과 짬짜미를 했다니 놀라운 일이다. 이들 나라에서 불법행위와 주권침해 책임을 규명하라는 목소리가 나오는 건 당연하다.
미국의 태도는 적반하장 격이다. 라이스 장관은 테러 용의자들의 고문 사실을 부인하면서 이들의 국외 이송과 구금은 “합법적 무기”라고 강변했다. 해당국의 양해를 구한 만큼 정면돌파를 하겠다는 발상으로 보인다. 일방주의에 기댄 힘의 논리를 다시 한번 실감한다. 오죽하면 미국 인권단체들조차 보편적인 인권과 국내법을 침해한 혐의로 중앙정보국 고위 관료를 상대로 소송을 내겠다고 하겠는가.
인권과 민주주의에 대한 미국의 이중 잣대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테러와의 전쟁을 이유로 불법적인 체포·이송·구금·고문 등의 인권침해를 방치하는 것은 국제사회의 수치다. 유엔 등 국제기구들은 개도국에 권고해온 보편적 인권 기준을 되돌아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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