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대단원의 막’이라는 말을 쓰기조차 민망하다. 우리 검찰이 이렇게 허약하고 수사능력이 떨어지는 줄은 미처 몰랐다. 대규모 수사인력을 들여 장장 140여일이나 끌어온 수사 결과 치고는 너무 실망스럽고 허탈하다. 뜨거운 관심사였던 삼성의 불법로비 의혹 등은 ‘알아봤더니 별 게 아니었다’는 식의 면죄부를 주는 것으로 끝났다. 문민정부 시절 도청에 깊숙이 개입한 안기부 고위간부나 권력실세들은 여전히 세상을 활보할 수 있게 됐다. 반면 엑스파일 내용을 보도해 불법도청의 환부를 도려내는 계기를 마련한 언론 쪽에는 가차없는 법의 철퇴가 내려졌다. 한마디로 본말이 뒤바뀐 수사 결과다. 예상했던 대로 문민정부 시절 안기부의 도청과 정치공작은 국민의 정부보다 심했으면 심했지 덜하지 않았음이 확인됐다. 심지어 미림팀이 수집한 도청정보는 안기부장의 대통령 주례보고서 내용에까지 포함됐다고 한다. 문민정부 시절 권력을 농단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씨의 이름도 어김없이 등장했다. 그는 이원종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 등과 함께 이 도청정보를 정치공작에 활용했음이 드러났다. 두 전직 대통령은 사과를 국가 정보기관에 의한 인권침해와 공작정치의 실상이 확연히 드러난 만큼 김영삼·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은 국민 앞에 고개숙여 사과하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김영삼 전 대통령은 안기부의 도청내용을 주례보고서로 접한 경위 등을 상세히 해명하기 바란다. 검찰의 이번 수사 결과는 많은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첫째, 국가기관의 불법행위에 대한 공소시효 배제의 필요성이다. 같은 범죄행위를 저지르고서도 통신비밀보호법의 공소시효 때문에 안기부 고위 간부들은 면죄부를 받은 반면, 국정원장은 둘이나 구속됐다. 법 논리로는 설명이 될지 모르지만 국민의 법 감정으로는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이런 모순을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도 국가기관 불법행위의 시효배제 문제를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둘째, 삼성의 불법로비 의혹을 이대로 묻어두고 갈 수는 없다. 검찰은 삼성 쪽의 해명성 진술에만 끌려다니다 결국 이건희 삼성 회장과 홍석현 전 중앙일보사 사장 등 모든 관련자에게 무혐의 결정을 내렸다. 국정원 도청 수사에서는 ‘가을의 찬서리’처럼 매서웠던 검찰이, 삼성이라는 재벌의 위력 앞에서는 ‘봄바람’처럼 따스했다. 삼성 쪽에서는 안도의 한숨소리가 들려오지만 세간에서는 불신에 찬 비웃음이 들려온다. 검찰 전·현직 간부들에 대한 삼성의 ‘떡값’ 제공 의혹 역시 검찰은 변명으로 일관하고 끝냈다. 애초 검찰에 그런 수사를 맡긴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이제는 특검을 통해 진실을 밝혀내는 길밖에 없다. 반드시 밝혀야 할 엑스파일 내용 셋째, 안기부 전 미림팀장 공운영씨 집에서 발견된 도청 테이프 274개의 처리 문제에 대해 정치권은 이른 시일 안에 결론을 도출하기 바란다. 검찰은 ‘독수독과론’을 들어 이 테이프를 수사 자료로 활용할 수 없음을 명확히했다. 하지만 이 테이프 안에는 절대로 그냥 넘길 수 없는 중대한 범죄행위의 단서가 담겨 있을 수 있다. 정치권은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특별법, 특검법에 대한 협상을 더는 늦춰서는 안 된다.검찰의 이번 수사 결과 발표는 결코 대단원의 막이 될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상황 끝’을 선언하고 넘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우리 사회의 고질병인 정-경-언 유착 고리를 이번에 끊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오지 않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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