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12.31 20:11
수정 : 2006.01.01 02:53
지난 한해 우리는 곳곳에서 ‘성수대교 참사’를 목격했다. 한강의 기적을 상징했던 거대한 다리가 어처구니없게 무너져내린 사건들이 잇따라 발생했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온국민이 마치 둔기로 머리를 맞은 듯한 충격을 겪었다는 점에서는 1994년 10월의 참사 때 망연자실했던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가장 큰 충격은 한국 최고 과학자, 국민적 영웅으로 여겨졌던 황우석 신화의 처절한 붕괴다. 황 교수는 학자로서, 과학자로서 해서는 안 될 논문 조작을 서슴지 않았고, 우리 국민뿐만 아니라 전세계를 우롱한 꼴이 됐다. 그의 연구 조작 의혹이 제기됐을 때 연구의 진정성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사람이건, 철저한 검증을 요구했던 사람이건 거짓의 꺼풀들이 하나씩 벗겨져 나올 때마다 허탈감 못지 않게 자괴감에 시달려야 했다. 황 교수에 부당한 해코지를 하지 말라며 촛불시위를 하던 초등학생들, 그에 관한 위인전을 읽고 미래의 꿈을 키워가던 어린이들이 받은 마음의 상처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리다.
무너져 내린 것은 학계와 과학계뿐이 아니다. 엑스파일로 불리던 불법 도청 테이프의 내용 일부가 공개되면서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 신장과 경제발전을 함께 이뤄낸 나라라는 겉치레와는 달리 얼마나 위선과 부패로 가득차 있는지가 백일하에 드러났다. 민주주의와 헌법을 지켜야 할 국가기관이 보호대상인 국민을 상대로 불법도청을 장기간 지속적으로 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나아가 재벌과 대형 언론이 민주주의 실행을 담보하는 주요한 제도인 선거에 부당한 영향을 끼치기 위해 얼마나 추접스런 발상을 하고 행위에 나서는지가 드러났다. 입만 열면 최고의 국가 사정기관이라고 자화자찬하던 검찰이 재벌의 로비대상으로 전락한 단면들도 불거져 나왔다.
불행하게도 정치권, 재벌, 언론의 추악한 유착실태는 제대로 파헤져지지 않았다. 그러나 절망하거나 냉소주의에 빠질 일은 아니다. 희망의 싹이 보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고무적인 것은 대부분의 국민들이 그냥 모르고 지나갔을 비리의 심층을 드러내게 한 자체 정화 능력이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점이 확인된 것이다. 그런 자부심을 바탕으로 폴싹 무너져내린 신뢰사회의 기반들을 하나씩 차근차근 쌓아가야 한다.
올해는 우리가 선진국 클럽이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지 10년이 되는 해다. 경제 규모나 교역량으로 보면 그럴싸하지만, 삶의 질, 사회의 투명도, 비주류 소외계층 배려, 갈등 현안의 해결방식, 국제사회에 대한 기여 등의 면에서 보면 선진국의 문턱에 들어섰다고 주장하기도 낯부끄럽다. 우리가 왜 이런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에 대한 냉철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하다.
지난 수십년 동안 권위주의 체제 해체와 물량적 경제발전을 위해 그저 허겁지겁 달려왔다면, 이제는 한단계 성숙해야 하는 만큼 매우 치밀한 설계도가 작성되어야 한다. 주먹구구식 발상과 집행은 이제 통용될 수 없다는 공감대가 사회 전반에 확대되고 있는 것은 아주 다행스런 일이다. 진보진영들이 스스로의 무기력과 게으름을 반성하고 앞으로 현실적 대안을 적극적으로 마련하겠다고 나선 것은 주목할 현상이다. 보수진영이 케케묵은 냉전수구 논리로는 사회통합을 이뤄낼 수 없다고 보고 다양한 방식으로 대안을 모색하고 있는 것도 바람직하다.
특히 올해 지방선거가 있고 내년에 대통령 선거가 예정돼 있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흐름은 새로운 희망을 갖게 한다. 선거 철이 다가올수록 정치·사회적 쟁점을 놓고 기계적인 편가르기와 패싸움 양태가 심해지는 것이 우리 사회의 고질병이었는데, 서로 합리적 대안을 놓고 겨루면 논쟁의 수준이 높아지고 그 결과물이 실효 있는 정책으로 사회에 환원되는 선순환 구조가 가동되는 것을 꿈꿀 수 있을 것이다.
신뢰의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은 현장 경험이 있는 전문가 집단들의 노력만으로 되지는 않는다. 사회의 구성원들이 새로운 틀을 짜는 데 광범하게 참여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 통합을 가로막는 양극화 현상과 각종 차별을 해소하기 위한 사회적 재원의 효율적 배분과 제도적 정비가 필요할 것이다. 새해를 맞아 다시 힘차게 첫걸음을 내디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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