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법원 판결은 판사 개인의 가치관과 양심을 담아내는 그릇이자 시대적 가치를 비추는 거울이다. ‘법관은 판결로 말한다’는 말도 이런 의미를 함축한다. 나라마다 명판결은 시대를 뛰어넘어 사회의 좌표 구실을 한다.참연연대가 판례 검색시스템을 통해 법원장 등 고위법관 28명의 하급심 판결문을 뒤져봤더니, 공개건수가 평균 18건에 그쳤다고 한다. 이들의 재직기간이 평균 27년이니, 1년에 채 1건도 공개하지 않은 셈이다. 법원장급 이상은 앞으로 대법관이나 헌법재판관 등 법치의 최종 심판자에 오를 유력 후보군이다. 이들의 판결문에 담긴 법 철학과 현안 인식이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수천 건 중에 고작 몇 건의 판결문으로 이를 평가하기엔 사실상 불가능하다. 국회의 인사청문 절차 역시 부실할 수밖에 없다.
현재 대법원 판결 건수는 연간 2만건, 하급심 판결은 45만건에 이르지만, 공개율은 대법원이 5%, 하급심은 0.05%에 불과하다. 예비 법관들의 교재나 판례 해설집에 자주 인용되는 판결조차 상당수가 미공개라고 하니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법원은 개인정보 보호 등을 이유로 전면 공개를 꺼리고 있다. 그러나 현재 법원 전산망에 수록된 판결문에서 실명을 가리는 전산작업만 서둘러도 공개 폭은 지금보다 훨씬 넓어질 것이다.
대법원은 ‘사법 살인’으로 불리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 판결문을 30년이 지난 지난해에야 일반에 공개했다. 만약 선별 공개로 ‘부끄러운 판결’을 감추려는 의도가 있다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다. 판결문 공개 확대는 비슷한 사건의 판결을 베끼는 관행을 줄여 사법 서비스의 질을 높이는 효과도 낳을 것이다. 이 문제를 다룰 사법제도개혁추진위원회의 전향적 제도 개선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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