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1.31 21:54
수정 : 2006.01.31 21:54
사설
“지금까지 우리는 인상파의 그림을 보며 자랐지만, 앞으로 우리 후손은 그의 비디오 아트를 보며 자랄 것이다.” 한국인에게 그 이름은 익숙하지만, 작품은 외면당했던 비디오 예술가 백남준에 대한 외국 예술가의 평가다. 사실 그는 버거운 존재였다. 무엇보다 그의 자유정신이 부담스러웠다. 충격적인 도발과 걸림 없는 예술행위는 제도에 안주한 이들에겐 불편하기 짝이 없다. 그가 예술을 ‘사기’라고 규정했을 때 근엄한 예술가들이 느꼈을 당혹감은 어떠했을까.
그건 제도 예술을 모욕하려는 것만은 아니었다. 변화된 시대정신을 드러낼 예술적 형식과 내용을 창조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1958년 전위예술가 존 케이지와의 만남을 “내 인생의 잊을 수 없는 사건”이라고 말했다. “내게 자유를 가르쳐줬기 때문”이었다. 그런 존 케이지였지만, 그는 1960년 한 퍼포먼스에서 객석에 있던 그의 넥타이를 잘라버렸다. 이는 98년 성추문에 휩싸여 있던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과의 만남에서 우연을 가장한 알몸 퍼포먼스로 이어진다. 이런 정신 속에서 영상·음향·조형 등 예술적 소재를 합쳐, 시대정신을 담아낼 예술의 한 갈래를 완성시켰다. 비디오·인공위성·레이저 등 과학과 예술을 결합했으며, 삶과 예술 사이의 틈을 없애려 했다.
사람들은 자유를 말하면서 우월한 힘, 전통, 규정에 의지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자유를 생명으로 하는 예술가와 지식인은 제도적 권위를 강조하고, 주류사회는 자유라는 이름 아래 자본과 시장에 대한 복종을 요구한다. 그는 생전에 귀국을 간절히 바랐지만, 이런 풍토에서 작품 활동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유해로나마 돌아오는 백남준의 때늦은 귀국이 우리 사회에 자유정신을 되살리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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