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8.16 20:13
수정 : 2005.08.16 20:14
툭 던지 한마디마다 우왕좌왕, “당 의제 설정 부족” 꼬집기도
“필요하시면 또 직접 편지를 쓰시겠죠. 그러면 우리는 열심히 읽고, 해석하면 되고….”
노무현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 가운데 ‘국가권력 남용 범죄의 형사 공소시효 배제’ 제안을 놓고 정치권과 학계·법조계 등에서 위헌시비 등 논란이 분분하자, 16일 열린우리당의 한 당직자가 한 말이다. 노 대통령이 먼저 문제를 제기하고, 아무런 협의는 물론 통보조차 받지 못한 여당은 뒤늦게 그 내용을 해석하고 해답을 찾느라 우왕좌왕하는 일이 계속되면서 당내의 불만도 점차 고조되고 있다.
열린우리당 관계자들은 대통령의 말 한 마디로 당 전체가 우왕좌왕하는 상황에 빠진 일은 한두 번이 아니라고 말한다. 지난해 ‘국가보안법 발언’이 대표적이다. 노 대통령이 <문화방송>과의 인터뷰에서 국가보안법을 두고 “박물관에 보내야 할 유물”이라며 폐지를 주장함에 따라, 천정배 당시 원내대표는 원내전략을 바꿔 한나라당과의 전면전에 나서야 했다.
최근 논란이 된 연정 구상도 마찬가지다. 연정론을 제기하고 다시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을 주장하는 데 이르기까지, 연정의 주체가 되어야 할 당 차원의 논의는 전혀 없었다는 게 당 관계자들의 일치된 설명이다. 처음부터 노 대통령의 일방적인 ‘편지’가 이어졌고, 당은 이메일로 받아 해석하기에 바빴다는 것이다. 한 초선의원은 “연정 문제에 있어 여당의원들은 일반 국민과 정보를 받는 시간이 똑같았다”고 말했다.
이번 광복절 경축사에 대해서도 노 대통령이 제안한 내용이 대부분 입법사항임에도 열린우리당 쪽은 제대로 된 정보를 전달받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경축사 내용을 당에 미리 통보했느냐’는 질문에 “안 한 게 아니라,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대통령이 최종 원고를 손질하면서 너무 늦게 나와서 그 내용을 당에 알리기에 너무 늦었을 뿐, 일부러 통보 않은 것은 절대 아니다”라고 설명했지만, 당이 배제된 것만은 인정했다.
한 핵심 당직자는 당의 ‘아젠더 설정 기능’이 실종된 것을 그 원인으로 꼽았다. 여당에서 정치상황을 이끌어 갈 수 있는 강한 의제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보니 대통령이 직접 나서고 있다는 해석이다.
대통령의 측근으로 꼽히는 이광재 의원은 “대통령은 국회의원 시절부터 연설문을 직접 쓰시던 분”이라며 “자신이 직접 아젠더를 만들어 던지는 일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의원은 “당이 역량을 길러 스스로 아젠더를 먼저 만들어 내는 수 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계속 누적된다면, 최악의 경우 ‘당-정 분리’가 아닌 ‘당-정 분열’로 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여당 관계자들은 지적한다.
최재천 의원은 “고위층에서는 이른바 ‘12인회의’로 의견을 교류하지만, 문제는 이런 의견이 당내 깊숙이까지 침투가 되지 않는 것”이라며 “민간의 ‘주니어보드’를 당-정-청 협의시스템에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초·재선의원들이 청와대의 비서관이나 보좌관들, 정부의 국·과장 등과 만나 실무 차원의 협의를 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춰 정보와 아이디어를 흐르게 하자는 것이다.
이태희 기자
herme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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