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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0.27 00:10 수정 : 2005.10.27 00:10

고향 대구에서 ‘벽’ 허물기에 모든 것을 걸었다가 머리가 다 세어버린 남자 이강철(58). ‘깡철’, ‘깡패’, ‘독립운동가’라는 별명을 가진 그가, 26일 밤 또한번 눈물을 흘렸다. 5번에 걸친 도전에도 결국 고향은 마음을 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말처럼 대구와 민주화에 ‘올인’했다. 민주화 운동으로 감옥살이와 수배 생활이 갈마드는 남편 때문에 하루도 편할 날 없던 첫째 부인은 1990년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섬유업으로 유복했던 집안도 기울었다. 두번째 부인이 운영하던 양장점과 횟집도 ‘자금’을 대느라 다 넘어갔다. 이번에는 청와대 수석비서관 자리까지 내놓았다.

1988년 ‘한겨레민주당’ 이름으로 대구에서 처음 출마한 그는 4등이라는 초라한 성적으로 재야의 한계를 절감한다. 89년 노무현, 원혜영, 제정구, 이부영, 유인태씨 등과 ‘야권통합추진위원회’(통추)를 구성하면서 현실 정치판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91년 3월에는 노 대통령과 함께 ‘꼬마 민주당’에 들어가 정치적 생사고락을 함께하기 시작했다.

92년과 96년 민주당 공천으로 대구에 잇따라 출마한 그는 늘 3등이었다. 지난해 17대 총선에선 여당인 열린우리당 후보로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인물을 봐달라고 해도, 늘 ‘김대중’, ‘운동권’이란 꼬리표가 가로막았다. 이번엔 모든 홍보물에서 열린우리당이란 이름을 빼는 고육책으로 ‘꼬리표’를 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막판에 불어닥친 색깔론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눈물’을 넘지 못했다. 이태희 기자 herme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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