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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1.06 19:12 수정 : 2006.01.06 19:22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6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민회관에서 열린 ‘한나라당 지방의회 의원 연찬회 및 날치기 사립학교법 규탄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행사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등원 거부 곧 한달…어떻게 봐야 하나

한 달 가까이 이어지고 있는 한나라당의 원외투쟁이 당내에서도 강한 반대에 부딪치기 시작했다. 사립학교법 개정을 이념문제로 비화시키거나, 원·내외 병행 투쟁조차 일절 거부하는 지도부의 태도를 성토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당 밖의 전문가들은 보다 근본적으로, 이런 원외투쟁이 지금의 상황에서 정당한 투쟁 방식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원외투쟁이 오랫 동안 군사독재를 경험하면서 생겨난 야당의 전통적 투쟁 방식이긴 하지만, 민주주의가 진전된 오늘날에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권위주의 시대의 마지막 저항 수단

김민전 경희대 테크노경영대학원 교수(정치학)는 6일 “민주 국가라면 원외투쟁은 있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5공과 같은 권위주의 시절에는 국회가 여당 중심으로만 움직였고 야당의 목소리가 국민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국민과 직접 소통하는 방식이 의미가 있었지만, 지금은 의회 민주주의가 진전됐고 언론의 자유도 충분히 보장되고 있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정치학자들은 의회민주주의에서는 다수당의 의견을 존중하고, 문제가 있는 법안은 이후 선거에서 공약으로 내걸어 유권자의 심판을 받는 게 바른 길이라고 입을 모은다. 정권교체가 거의 불가능해 야당은 항상 소수파로 머물러야 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정권교체와 의회 다수당 교체를 여러차례 경험했다는 것이다. 김형준 국민대 교수(정치학)는 “법에 부작용이 있으면 국민이 판단한다”며 “한 지도자의 판단에 따라가는 것은 국민을 무시하는 권위주의”라고 비판했다.

다수파의 독주라는 불가피한 상황에서 원외투쟁을 할 수 있다는 의견도 일부 있지만, 이 때도 대다수 국민의 동의가 전제돼야 한다는 데는 학자들 간에 이견이 없다. 김영태 목포대 교수(정치학)는 “지금 한나라당의 원외투쟁은 그런 기준에서 벗어나 있다”며 “책임있는 정당이라면 원외투쟁이 인정받지 못할 때 스스로 포기하거나 양보해야 정치가 안정된다”고 말했다.

선진국에서는 2차대전 이후 보기 힘든 일

외국의 경험을 살펴봐도, 원외투쟁은 의회정치가 불안정한 중남미 국가 또는 전체주의의 등장으로 정국이 요동쳤던 1920∼30년대의 유럽에서나 유례를 찾아볼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의회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다수파의 교체가 가능해진 뒤, 야당은 의회 안에서 반대 토론을 하거나 당원을 상대로 보고대회를 여는 방식으로 다음 선거를 겨냥한 전략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의회에서 반대 연설을 장시간 계속해 의사 진행을 저지하는 ‘필리버스터’가 항의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하지만, 반대하는 법안이 통과되면 대법원에 위헌소송을 내는 게 일반적인 대응이다. 김민전 교수는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소수당이 항의 표시로 기권을 하기도 했지만, 결국 손해임을 깨닫고 반대 투표를 한 뒤 위헌소송을 내는 쪽으로 전환했다”고 말했다.


정치학자들 “군사독재 시절에나 통하는 일” 입모아
위원소환제 등 여론 존중할 제도 도입 필요성 지적

내각제인 일본에서는 교섭단체간 합의가 중시되고, 소수당이 물리적인 방해를 시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자민당의 장기집권이라는 특수한 정치 상황에서 항상 소수파일 수밖에 없는 야당을 배려하는 차원으로 받아들여진다.

유권자 판단에 맡겨야

전문가들은 우리 정치에서 원외투쟁의 악순환이 쉽게 사라지기는 어려울 것으로 내다봤다. 김일영 성균관대 교수(정치학)는 “가장 바람직한 것은 표결에 참여해 다수결에 승복하는 것이지만, 타협과 조정의 문화가 성숙하기 전까지는 원외투쟁이 이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이 때문에 제도적 방지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박효종 서울대 교수(정치학)는 “로마시대 검투사들이 상대가 쓰러질 때까지 공격을 계속하던 ‘검투사 정치’가 재연되는 것 같아, 우려된다”며 “여야가 아주 심각한 대립 양상을 빚을 때 제도적으로 해결할 기제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결국 심판관은 국민 여론인 만큼 국회의원 소환제도 등이 활성화하면 여론과 동떨어진 여야 대결이 계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손호철 서강대 교수(정치학)도 “유권자와 사회적 통념이 용인하기 때문에 원외투쟁이 재생산되는 것”이라며 “결과에 승복하는 것에 대한 제도화가 이뤄져야 한다”고 주문했다.

박용현 황준범 성연철 기자 piao@hani.co.kr

여당 독단에 야당 ‘마지막 카드’ 명분 약할 땐 ‘회군’ 도 감행

과거 원외투쟁 어떻게

과거 야당이 국회 일정을 거부하고 원외투쟁에 나선 배경에는 여당의 법안 날치기 처리나 주요 정치 사안에 대한 여당의 독단적 태도가 자리잡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여론이 야당의 손을 들어주는 사안들이었다.

1980년대에는 야당이 민주화를 위해 재야·학생운동 세력과 손잡고 거리에 나섰고, 1990년대 들어서는 우루과이라운드나 12·12 및 5·18 쿠데타 관련자 기소 문제 등이 원외투쟁의 발단이 됐다. 96년 12월26일 새벽 당시 여당인 신한국당이 노동법과 안기부법을 기습 처리하면서 촉발된 야당의 원외투쟁은 여론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여야 총재회담을 수용하면서 마무리됐다. 당시 노동법 날치기 처리에 대한 반대 여론은 60%를 넘었다.

97년 대선에서 정권교체가 이뤄진 뒤에는 대선자금 수사, 여당의 선거비용 실사 개입 의혹 등 주로 정치적 사안이 원외 정국을 초래했다. 당시 야당이 잦은 원외투쟁에 나선 배경에는 정권을 잃은 데 따른 위기감도 작용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야당이 원외투쟁에 나섰다가 등원하는 과정은 대개 여야 총재회담 등을 통해 대타협을 이루거나 야당 지도부가 민생 현안 해결 등을 명분으로 결단하는 식이었다. 특히 과거엔 원외투쟁을 할 때도 여야가 접촉 창구를 열어두고 꾸준히 타협을 모색하곤 했다.

때로 원외투쟁의 명분이 약할 때는 전격적인 ‘회군’도 이뤄졌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는 98년 10월 한나라당이 국세청을 동원해 대선자금을 모은 것으로 드러나 수사가 진행되자 원외투쟁을 선언했다가, 별다른 사정 변화가 없는데도 전격적으로 등원을 선언했다.

원외투쟁 때 야당 내에서 조기등원론이 제기되는 것도 다반사였다. 지난 2000년 한나라당의 원외투쟁 때 박근혜 당시 부총재는 “(민생문제 해결에) 필요한 법안은 통과시키고, 우리 주장은 국회 안에서 협상을 통해 관철해야 한다”며 지도부를 비판한 바 있다.

박용현 기자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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