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권·교사·‘반박’ 경력 칭송…사학법투쟁 접고 등원 기대감
한나라당, ‘개’(김무성) 피하려다 ‘범’(이재오) 만난 꼴 된 것
“어제 한나라당 원내대표 선거에서 경륜있는 이재오 의원이 당선된 것을 축하합니다. 민주화 투쟁을 오래 했고, 진보정당 사무총장도 했던 분이라 원내 관계가 부드러워질 것으로 봅니다.”(유재건 열린우리당 의장)
“이재오 의원은 1970년대 초반부터 교사 운동을 하던 분입니다. 참교육 운동의 원조가 아닐까 합니다. 사학문제와 사학재단 비리나 개선 과제에 대해 잘 아는 분이고 소신이 강한 분입니다.”(원혜영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대행 겸 정책위의장)
13일 아침 서울 영등포동 열린우리당사에서 열린 회의에선 이재오 신임 한나라당 원내대표에 대한 ‘칭송’이 쏟아졌다.
유재건 의장과 원혜영 원내대표 대행 등 ‘투톱’이 앞다퉈 이 원내대표를 한껏 추켜세웠다. 민병두 기획위원장은 이 원내대표와 노웅래 열린우리당 의원이 대성고등학교 사제지간인 점을 환기시키면서 “노 의원이 이 원내대표에게 ‘원내로 들어오시라’고 하면 들어올 것이다. 여야 관계가 잘 될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전날 한나라당의 원내대표 선거 직후에도, 전병헌 열린우리당 대변인은 “민주화 운동 경력과 3선의 경륜으로 새로운 정치문화 정착과 합리적 국회운영에 나서주길 기대한다”며 “국회법 절차를 준수하는 상생과 협력의 정치문화를 만드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한 원내대표로 기록되기 바란다”는 논평을 내놨다.
모두 상대 정당의 신임 지도부에 대한 ‘의전’ 수준을 넘어, 다분히 ‘환영’과 ‘기대’가 묻어나는 반응이다. 도대체 ‘이재오’가 누구길래 열린우리당은 이처럼 반기는 것일까?
“사학의 개선 과제 잘 아시는 분”…노웅래 의원의 대성고 담임 선생님
이 원내대표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그의 경력을 뒤져보면, 여당에서 그에게 붙이고 있는 ‘민주화 운동 경력’과 ‘경륜’, ‘사학의 개선과제를 잘 아는 분’ 등의 수식이 ‘공치사’가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1945년 ‘해방둥이’인 이 원내대표의 첫 직업은 국어 선생님이었다. 대학(중앙대)에서는 경제학과를 나왔지만, 1967년 이동중학교를 시작으로 10여년 간 네곳의 중·고교에서 국어 교사를 했다. ‘교육’은 고려대 교육대학원에서 전공했다. 노웅래 열린우리당 의원과의 인연도 1973년 대성고등학교 시절의 일이다. 이 원내대표는 그 때 국어 교사로서, 노 의원을 가르쳤다. 17대 국회에서 만난 두 사람은 국회 문화관광위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이 원내대표는 노 의원에 대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때 웅래의 부친은 야당 국회의원인 노승환 전 의원이셨는데 야당 정치인의 고생과 핍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웅래에게 유달리 정이 많이 갔다”고 술회한 바 있다. 노 의원은 “선생님은 당시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다니셔서 다른 선생님들과 많이 달랐다. 생각을 넓힐 수 있도록 다양한 자료와 책들을 소개해주셨고, 유명 문학가를 초빙해서 특강을 하기도 했다”고 이 원내대표에 대한 기억을 전했다. 이 원내대표가 15대 국회 하반기부터 16대 국회 하반기까지 내리 6년 동안 국회 교육위원을 지낸 것도 교사 경험이 밑바탕이 됐다. ‘화려한 민주화 운동 경력’…“자랑 아니지만 내가 옥살이 제일 길어”
임채정·장영달·김근태·유인태 등 운동 동지도 수두룩 국어 선생님 이후 그의 경력은 더 ‘화려하다’. 1971년 민주수호 청년협의회 회장, 79년 한국민주투쟁국민위원회(민투) 위원장, 86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민족통일위원장, 88년 자주민주통일국민회의 사무국장, 89년 서울민족민주운동협의회 상임의장, 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조국통일위원장, 제1회 범민족대회 집행위원장, 그리고 91년 민중당 사무총장…. 이 과정에서 이 원내대표는 유신시절 세 차례, 5공과 6공 시절 각각 한 차례씩 모두 합쳐 다섯 차례에 걸쳐 10년여의 감옥 생활을 했다. 이 원내대표는 2003년 <한겨레21> 인터뷰에서 “자랑은 아니지만 현직 국회의원 가운데 옥살이 기간을 따지면 내가 제일 길고 그 다음은 민주당(현재 열린우리당) 장영달 의원”이라고 주장했다. 당시의 양심수들이 대부분 그렇듯, 투옥 기간 내내 ‘독방’을 썼다고 한다. 이 원내대표는 12일 취임 직후 기자간담회에서 대여 관계에 대해 “내가 그 사람들(열린우리당)을 잘 알고, 그 사람들도 나를 너무 잘 안다”고 말했는데, 모두 지난날 민주화 운동의 궤적을 함께 한 경험 때문이다. 열린우리당의 임채정·장영달·김근태·유인태·배기선·원혜영 의원 등과 친분이 두루 두텁다고 한다. ‘반 박근혜, 친 이명박의 대표 인물’ 이 원내대표는 1992년 14대 총선 때 서울 은평을에서 민중당 후보로 나와 현실정치에 첫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그 뒤 96년 15대 총선에서 당시 집권여당인 신한국당 후보로 출마해 서울지역 여당 의원 가운데 최다득표를 기록하며 화려하게 정치권에 입성했다. 현실정치에 들어선 뒤 이 원내대표는 늘 ‘강성’, ‘저격수’, ‘싸움닭’의 대명사로 불려왔다. 대선이 있던 2002년에 그는 원내총무로서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건의안과 이용호 게이트 특검법안 관철을 주도했다. 같은 해 ‘김대업 정치공작 진상조사단장’과 ‘4억달러 대북 뒷거래 진상조사단’ 위원을 맡아 대여 공세에 앞장섰다. 당시 정형근·김문수·홍준표 의원 등과 함께 여당 저격수 노릇을 자임했다. 그는 원내대표가 된 직후에도 스스로 “강성으로 치면 내가 (김무성 원내대표 후보보다) 더 강성이지”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한나라당 내에서의 관계로 치면, 이 원내대표는 ‘반 박근혜, 친 이명박’의 대표 인물이다. 이 원내대표는 2002년 이명박 서울시장 후보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아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고, 이 시장 당선 직후에는 서울시장 직무인수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그 스스로 “이 시장과 가까운 것 인정한다. 가끔 만나 소주도 마시는 사이다”라고 말한다. 비록 이번에 포기했지만, 서울시장 도전의 꿈도 이 시장의 선거를 도울 때부터 꿔왔단다. 박 대표와의 관계는 ‘악연’의 연속이었다. 2004년의 일이다. 정국에 ‘과거사’ 논쟁이 한창인 시점에 이 원내대표는 박 대표를 “독재자의 딸”이라는 표현으로 맹비난하면서 “박근혜 의원 개인의 정치적 장래를 위해서나 한나라당이 야당으로서 도덕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나 독재시절 박근혜 의원의 과오에 대해서 국민들 앞에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슷한 시기 행정수도 이전 논란 때도 이 원내대표는 당내 서울·수도권 의원들과 함께 박 대표와 당론(행정수도 이전 찬성)에 저항하며 ‘장외투쟁’을 주도했다. 지난해 초 열린우리당이 주도하는 ‘4대 법안’ 대치 국면에서도 이 원내대표는 “한나라당이 과거사법이나 국가보안법, 사립학교법 개정안을 지연시킬 이유는 없다”며, 2월 임시국회 처리를 주장하며 박 대표와 대척점에 섰다. 한나라당의 원내대표로 선출된 12일, 그는 기자들에게 “이제 더이상 ‘비주류’ 아니고 ‘주류’가 됐다”며 “‘비주류 강경파’니 ‘반박의 대표격’이라는 딱지를 떼달라”고 신신당부했지만, 기자들이 이 말의 취지를 이해하면서도 선뜻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것은 그의 ‘전과’가 너무 명백하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이 ‘이재오 원내대표’의 탄생을 반기는 진짜 속내는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나라당 전략통 “개’(김무성) 피하려다 ‘범’(이재오) 만난 꼴” 아무튼, 이 원내대표는 13일 사학법 재개정안을 만들어 24일 열린우리당 원내대표가 새로 뽑히면 협상을 시작하겠다고 밝혔다. 원외투쟁 일변도와는 분명 다른 노선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황우석 사건, 엑스파일, 브로커 윤상림 사건 등을 거론하며 “노무현 정권의 실정을 규탄하는 투쟁으로 상향조정하겠다”고 밝혔다. ‘싸움의 달인’이 양동작전을 꺼내든 것이다. 한나라당의 한 전략통 의원은 “여당으로서는 ‘개’(김무성) 피하려다 ‘범’(이재오) 만난 꼴이 된 것”이라고 비유했다. 이 원내대표에 대한 열린우리당의 ‘칭송’이 바람대로 현실화될지, 순진한 기대로 끝날지는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다. 황준범 기자 jayb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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