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중요사안 문제제기 할수 있을지“
부속실 직원이 최초 전달 기강행이 심각
청와대가 22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비밀문건 유출 조사 결과를 공개함으로써, 청와대 깊숙한 곳에서 진행돼 온 외교·안보 문제를 둘러싼 노선투쟁의 한 단면이 드러났다.
청와대는 이날 의전비서관실의 이아무개 행정관을 문건 유출의 ‘범인’으로 지목했다. 그러면서도 “고의성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 행정관도 <한겨레>와 전화통화에서 “이렇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정신이 혼미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실수라는 얘기다.
그러나 그 ‘우연’ 뒤에는 ‘필연’이 깔려 있다. 이 행정관은 사건 초기부터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른 인물이다. 오히려 “가장 먼저 의심받을 게 뻔한데 그런 모험을 했겠느냐”는 청와대 관계자의 반응이 나올 정도였다.
이 행정관은 이른바 ‘자주파’의 핵이다. 이종석 전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차장이 주도하던 대미 외교를 굴종적이라고 보는 관점을 지녔다. 그의 소신은 개인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고, 청와대 국정상황실과 민정수석실의 권력 핵심들에게도 전파돼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게 됐다.
결국 이런 갈등으로 2005년 4월 ‘전략적 유연성’을 놓고 이 사무차장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보고서가 올라가, 이 사무차장이 조사를 받는 결과까지 낳았다.
청와대 발표에서 이 행정관이 최재천 열린우리당 의원을 만날 때 동석한 것으로 드러난 권아무개 전 청와대 행정관도 이 행정관의 영향을 받은 인물이다. 그동안 나온 ‘이종석 견제 문건’은 권 전 행정관이 이 행정관과 상의해 작성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행정관의 문제의식은 국회에 들어오기 전부터 통일·외교 분야에서 비판적 관점을 길러온 최 의원과 맞아떨어졌다. 최 의원은 2004년 권 전 행정관을 용산기지 이전 문제 토론회에서 만나 의기투합한 뒤, 이 행정관과 세 사람이 가끔 만나 의견을 나눠 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 행정관이 유출자로 드러남에 따라, 청와대 안 ‘이종석 견제파’의 입지는 극도로 좁아졌다. 노무현 대통령은 문건 유출 사건이 터지자 “이미 내부 토론과정을 통해 다 끝난 사안인데 왜 뒤늦게 문제를 일으키느냐”며, 범인 색출을 강력하게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종의 ‘불복’으로 보는 것이다. 이 행정관과 뜻을 같이 해온 한 비서관은 “이제 입이 있어도 열 수 없는 처지”라며 “앞으로도 한-미 관계에서 중요한 논쟁점들이 많이 있는데 제대로 문제를 제기할 수 없는 상황이 돼 버렸다”고 말했다.
이번 문건 유출사건으로 청와대 문서 관리의 허점과 내부 기강해이의 심각성도 여실히 드러났다. 이 행정관은 문제의 회의록을 제1부속실의 한 직원으로부터 전달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 회의록은 청와대 안에서도 극히 제한된 사람만이 볼 수 있는 3급 기밀문건으로, 이 행정관은 문서 접근 권한이 없다. 그런데도 제1부속실의 이 직원은 같은 외교부 출신 선배인 이 행정관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결국 비밀문건이 최 의원에게까지 전달돼 공개되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이 부속실 직원은 노무현 대통령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보좌하는 인물이어서, 적지 않은 충격을 주고 있다. 청와대는 이날 발표를 계기로 문건 유출 파문이 가라앉기를 바라고 있다. “고의성이 없었다”고 강조하는 것도 이런 바람 때문이다. 하지만 사태가 청와대의 생각과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가능성도 있다. 우선 한 인터넷 매체를 통해 누출된 국정상황실 문건의 유출 경로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김만수 청와대 대변인은 “국가안전보장회의 회의록 문건과 달리 국정상황실 문건 등은 상당히 광범위하게 유통되는 성격의 문서로 비밀 분류도 안돼 있고, 접촉 범위도 넓어 경위 조사에 시간이 걸린다”고 말했다. 게다가 이날 노회찬 민주노동당 의원이 또다른 문건을 공개해 청와대는 ‘문서 유출 홍수’ 사태를 맞고 있다. 문건 유출을 조사했던 청와대 관계자가 “우리도 지쳤다”고 말할 정도다. 이 행정관과 문제의식을 함께 하는 세력들이 청와대 비서실과 통일외교안보정책실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점도 또다른 파장의 가능성을 예고하고 있다. 청와대 비서실과 안보정책실에서는 ‘친 이종석’ 인사가 소수로 분류될 정도다. 제2의 이 행정관이 계속 나올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특히 용산 기지 이전과 관련한 비용 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질 예정인 오는 6월께가 되면 대미 외교노선을 둘러싼 갈등이 다시 한번 전면에 떠오를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 김의겸 기자 kyumm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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