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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대통령 ‘여양보’ 발언 파장과 국정운영 |
노무현 대통령이 사학법 개정을 둘러싼 국회 파행 사태와 관련, '여당의 양보'를 권고했지만, 열린우리당이 '양보 불가' 당론을 재확인해 여권내 불협화음이 노출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여당이 대통령의 뜻을 따르지 않는 결과를 초래해 대통령 국정장악력에 흠집이 생기고, 여권내 정책 결정과정의 난맥상을 초래했다는 지적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불협화음이 당장 당청간 충돌 사태로 비화되지 않을 전망이지만, 초당적으로 국정을 총괄해야 하는 대통령과 5.31 지방선거를 목전에 두고 있는 당의 입장 차이에 기인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과성 사안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또한 `여당의 양보'를 해법으로 제시한 노 대통령의 이번 언급은 임기 후반기 국정운영 기조를 '안정'을 우위에 두고 이끌어 가겠다는 강한 의지를 엿볼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특히 후반기 핵심적인 양대 국정 어젠더인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양극화 해소 과제의 원만한 추진을 위해서는 야당의 협조가 불가피하다는 점에서, '대화정치'를 안착시키기 위한 원려가 담겨 있다는 해석도 있다.
◇청-여 사전조율 없었나 = 사학법안을 염두에 둔 노 대통령의 '여당 양보' 언급은 사전에 열린우리당 지도부와 조율을 거치지 않았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29일 청와대 조찬은 국회교착 상태에 안타까움을 갖고 있던 노 대통령의 판단에 따라 이병완 청와대 비서실장이 28일 오후 김한길 열린우리당, 이재오 한나라당 원내대표에게 전화로 초청의사를 전함으로써 이뤄졌다.
하지만 노 대통령이 이 자리에서 '여당의 양보'를 촉구할 것으로는 여당 관계자들이 예상치 못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열린우리당 관계자는 "임시국회 정상화와 관련해서 자리를 갖자는 차원이었고, 이대로 임시국회가 끝나면 여야 모두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원내대표가 조찬에 참석했던 것"이라며 "하지만 대통령이 여당에게만 양보를 요구할 줄 몰랐다"고 말했다.
그러나 청와대는 노 대통령의 이번 조찬 회동 '권고'에 대해 과거 패러다임식으로 여당 총재를 겸했던 대통령이 여당 원내대표에게 원내전략을 '지시'한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입장이다.
국정운영책임자인 대통령으로서 국회 여야 교섭단체 원내대표들에게 '답답한 심경'을 토로하고 협조를 당부하는 자리었던 만큼 '여당과의 사전조율'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은 과거식 접근이라는게 청와대 설명이다.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대통령은 이전부터 국회 원내전략에 대해 여당에게 이래라 저래라 지침을 전달하거나, 이를 전제로 사전조율을 하거나 한 적이 없다"며 "여야 원내대표를 초청한 자리에서 그같은 말씀을 하신 것은 국정운영 책임자로서 교착상태에 빠져 중요 법안들이 처리되지 않고 있는데 대한 답답한 심경을 토로하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여당이 이 같은 대통령의 '고민'을 존중해 사학법 협상에서 양보하는 '결단'을 내렸다면 모르지만, 여당이 '양보 불가' 당론을 재확인함으로써 여권내 조율이 매끄럽지 못했다는 지적이 대두될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정치의 '당정분리', 정책의 '당정일체'를 일관되게 강조해온 노대통령과 여당으로서는 정책의 불협화음을 노출했다는 비판을 면키 힘들 것으로 보여 당.정.청 시스템 재점검 필요성도 재기될 전망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와 관련,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당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것이라는 예단을 갖는 것 자체가 구시대적 사고"라며 "대통령으로서의 입장을 얘기한 것이고, 당은 당의 판단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라고 당.청 갈등설을 일축했다.
◇'실용주의' 접근 강화되나 = 노대통령이 '여당의 양보'를 권고한 사학법 개정안은 '개혁정당'을 표방하는 열린우리당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법률안중 하나이다.
노 대통령도 사학법 개정안에 대해 일관되게 지지하는 입장을 표방하고 있고, 지금도 여당 법안의 원칙적 타당성에 대한 소신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이 청와대 참모들의 얘기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사학법 재개정을 둘러싼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팽팽한 대결로 초래된 교착 국면에서 "원칙을 고수하라"고 여당의 기(氣)를 세워주기보다는 "양보를 통해 문제를 푸는게 어떠냐"며 오히려 '양보'를 주문했다.
사학법이라는 일개 법안에 발목이 붙잡혀, 부동산대책, 국방.사법개혁 및 동북아역사재단법안 등 다른 중차대한 법안들의 처리가 지연되는 만큼 '원칙'을 양보하는 대신 다른 법들을 빨리 처리토록 해 국정운영의 숨통을 터자는 것이 그 이유이다.
이 같은 노 대통령의 해법은 '원칙주의'보다는 '실용주의'적 접근으로 해석될 수 있다.
임기 초반 행정수도 이전, 과거사법 등 중요 정책 현안에 대해 우회로를 택하기보다는 원칙 관철이라는 정공법적 입장을 견지했던 노 대통령의 면모와는 사뭇 다른 접근으로 비쳐지고 있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에 대해 "원칙이냐 실용이냐는 문제라기보다는 정치권의 현재 상황이 다수결로만 국정운영이 어려운 상황이라는 전제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원칙을 포기하는 것으로 확대해석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하지만 임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국정 우선 순위의 선정에 있어 변화가 있다는 해석은 충분히 가능해 보인다.
야당에서 '색깔론' 시비까지 제기하면서 여야가 충돌했던 사학법 관철을 고집하기보다는, 하나를 '포기'하고 부동산문제나 국방.사법개혁 과제를 마무리하는 실리적 접근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게 대통령의 인식이라는 해석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노 대통령이 '여당 양보'를 제안하면서 원만한 국정운영을 위해 여야뿐만 아니라 "여당과 정부 사이에서 서로 주고 받는 일이 필요하다"고 언급한 부분은 주목된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에 대해 "대통령과 당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법안과 정책이 다를 수 있고, 대통령은 당보다는 더 큰 틀에서 국정을 고민할 수밖에 없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노 대통령으로서는 임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야당과 첨예한 각을 세우는 정치적 인화성(因火性)이 높은 정책보다는 한미 FTA나 양극화 해소 등 보다 포괄적인 국정과제 실천을 위해 '실용주의' 접근을 취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올들어 '대화정치'를 강조하며, 야당을 포함한 국회 상임위원들과의 접촉을 시도하고 헌정사상 청 여성총리인 한명숙(韓明淑) 총리를 기용하면서 '국정의 안전항해'를 강조한 것도 이런 흐름의 연장이라는 해석이다.
sgh@yna.co.kr
성기홍 기자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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